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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듕궉여행 후기 2 : 8월 24일 둘째 날1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자료로 보는 고대사

듕궉여행 후기 2 : 8월 24일 둘째 날1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09. 9. 11. 01:17

아직까지 사진을 찍는 감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긴 사진을 찍은지 5년 가까이 되다보니 머얼리 머얼리 안드로메다 관광여행이라도 떠났나봅니다.
말도 사맛디 아니한 듕궉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무는 걸 바라보는 오자서의 심정으로 찍었습니다.
그러나 찍은 사진이 많은 이상 두 차례에 걸쳐서 나누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4일은 환인현의 오녀산성을 방문하였습니다.
비사성이야 오토바이로 올랐지만 오녀산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계령은 RGM-79에게 오지마라, 내려가라 하지만
이놈의 산은 거부하질 않는군요.
제발 출입거부 명령 좀 내려주시옵소서..
일행들에게 산은 멀리서 보는 것이지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항변하였지만 결국 끌려끌려 올라갔습니다.




첫날 밤을 보낸 단둥시의 호텔 앞 공원을 찍었습니다.
공원에선 밤새 라디오를 틀었고, 그 소리는 여기가 딴 나라라는 실감을 전해주었지요.
저녁을 먹기 위해 지나친 곳에선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흥겨운 분위기였습니다.
다들 술집 아니면 집에 틀어박힌 우리완 다르달까요?
그러나 인터넷이 보급되고 더욱 개인화 된 후의 공원은 어떻게 바뀔까.. 매우 궁금하였습니다.

RGM-79가 머문 방은 전망이 매우 둏았습니다.
방에서 저 걸 찍었어야 하는데..란 후회가 든 건 이 사진을 찍은 뒤였습니다.
사진에 있어서만큼은 후회가 많은데
원래 사진을 둏아하지 않는데다 감각도 떨어지니 그렇지요.
문구는 경제발전 잘하고, 모두 화목한 사회 건설하고 행복한 단둥시민되자..
뭐랄까 오래간만에 선전문구로 도배된 시절의 기억을 되살린달까요.
뭐, 1980년대 전세계 신문 중에서 자유, 민주주의란 단어가 가장 많이 들어간 건 프라우다였습니다.
(로동신문과 조중동도 만만치는 않았죠)

호텔 앞은 뭔가를 파는 사람들이 오더라구요.
일행분들은 과일이나 먹을 것을 사시는데
RGM-79는 지도를 샀습니다. 작은 지도 큰 지도.
처음에 손가락 3개를 펴길래 30원이라고 생각하고 드리니 매우 웃으시더라구요.
RGM-79의 버릇인 자료 2배수 확보하기로 한 부씩을 더 사고 도합 60원을 드리니 매우 행복해 하십니다.
돌이켜보면 그 분은 3원을 불렀는데 10배수를 주고 산 것 같습니다.

머리 탓하기 전에 자료값은 아끼지 않는다가 신조인 만큼 ...
뭐 실은 그래도 싼 가격이니 아프지 않다는 얄팍한 맘이 약으로 작용한 것이겠지요.



오녀산성을 앞에두고 점심을 먹고 차를 타기 전 찍은 전경입니다.
처음 온 길인데 혹시 한 번 온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자료를 쳐봤으니
저 산을 꼭 올라야 한다는 생각은 달아났습니다.
비사성 때부터
산은 멀리서 구경하는 것이다,
서양 되놈(판소리로 유명한 신재효의 단가 표현입니다)이나 정복한다 떠드는거다,
RGM-79는 3계단 이상 승강기다...
일행들은 4일째 되는 날까지 귀가 따갑게 들어야 했습니다.
멀리서 보는 오녀산성은 알흠답습니다.
단 올라가기 전까지만요.



오녀산성을 오르기에 앞서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내리고
오녀산성 유물전시관에 들러 유물 구경하고 버스를 타고 산 중턱까지 오른 다음
본격적으로 산에 오릅니다.

그러나 오녀산성 유물전시관을 찍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 건 귀국 후였습니다.
전시관은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을 전시하였는데
워낙 짧은 시간 머문데다 그야말로 고구려의 '선사'시절이니만큼 양은 빈약했으나
재미있는 것은 많았습니다.
어지간히 내용이 달라도 여긴 듕궉이니까 그러고 넘어간 건 많았는데
딱 하나만은 못참고 한 마디 했습니다.

오녀산성을 쌓는 모습의 홀로그램 전시물이 있었는데
여성들이 성벽을 쌓는데 동원된다는 생각도 황당하긴 했지만
그 여인들의 반수가 치마를 입고 있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치마를 입은 여인은 그야말로 손에 물 묻힐 일 없는 귀족여인들이고
노동을 해야하는 여인들은 바지를 입었습니다.
그러니까 치마는 결코 나와서는 안된다는 거죠.

사진 아래쪽에서 등을 보이신 분들은 거의 일행분들이셨습니다.
특히나 기념품 가게에 몰리셨지요.
뭐 이원익의 시조 초장과 중장처럼 버드나무 잎으로 천만가닥의 실로 묶어도,
꽃을 탐하는 벌과 나비가 아무리 날개짓해도 붙들어매지 못하는 건 쇼핑심리입니다.
그럼 RGM-79뭐했냐고요?
일찌감치 오녀산성 보고서와 도록 몇 권을 구매했지요.



이때부터 정말 여기 온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업 때 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무거운 투구쓰고 갑옷 입고, 무기 들고 군장메고 성안의 놈들을 떼찌떼찌하러 먼길 왔지,
그런데 대장은 여기까지 왔으니 잠시 쉬잔 말도 안하고 올라가라 하지,
숨은 넘어가는 데 빨리 올라가라고, 저 色姬 발 보이네 그러지...
올라갈 때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가냐, 빈 손에 올라가라 하냐, 천천히 가라하냐.. 참 말 죽겠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바로 RGM-79의 심정이 그겁니다.
나, 안 올라가면 안되겠니???????



하늘은 맑고 산은 높고
원래 바람직한 五德侯(다섯가지 미덕을 가진 제후)의 자세는
놋북 꺼내놓고 돗자리깔고 디비져서 스쿨데이즈나 봐야하는 겁니다.(응?)



이제 겨우 몇 계단 올랐는데 뒤를 보니 언제 왔던가 아득해지고..
눼, 10분의 1도 아니 와서 이 모양입니다.
3계단을 훨씬 넘겼는데 계단이 절로 올라가진 않네요.



위를 올려다보니 만족할 줄 알면 위태함이 없느니라던 노자님 말씀이 떠오르고..
(아! 도덕경을 읽었을리가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인용문이 나옵니다. -_-;;;;)
사진에 보이는 분은 RGM-79를 갈구기 시작하려다 여행기간 끝나 아쉽게 된 일행분이십니다.
아직도 이 분은 RGM-79가 진성 M인줄은 모르십니다.



아!
이걸 보고 아즈망가 대왕을 떠올린 것은 RGM-79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부릅니다. You Are Not Alone~..



두보의 시, 등고登高를 무척 좋아하는 RGM-79는 산에 오르기 싫어합니다.
올라서 내려다보는 것은 좋아하는데, 내려가는 건 잘하는 데 왜 올라가는 것은 싫어할까요?
머얼리~ 환인현이 내려다 보입니다.
바로 고구려를 낳았고, 그들이 다른 곳으로 옮긴 뒤에도 조용히 나라의 명운을 지켜본 곳입니다.

고구려라는 이름은 이 곳에서 나왔지요.
성을 뜻하는 구루溝婁(홀忽)에 높음을 뜻하는 접두사 고高가 붙어
언젠가 나라의 이름을 한자어로 우아하기 꾸밀적에 고구려라는 이름이 붙었겠지만
원래 의미는 '높은 곳에 성을 쌓고 사는 놈들'이라는 뜻일 겝니다.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환인현의 자연환경은 강원도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지금이야 농업기술이 발달하여 소출량이 급격히 늘어났지만
과거 2천년 전 수준의 농업으로는 도저히 전인구를 먹여살리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더욱이 현도군 설치 후 이 곳이 저항의 메카였다면 유입인구도 만만치 않았겠지요.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힘을 키워 삥뜯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특히 듕궉의 현도군, 더 나아가 요동군이 그 대상이 되지요.
삼국지나 후한서에서 평야를 끼고있는 부여는 참말로 개념 충만하다는 칭찬을 듣고,
산골짜기에 사는 고구려는 안드로메다로 개념 보낸 놈 소릴 듣는 게 아닙니다.
(설마 부여인들은 착하고 고구려놈들은 싸가지 밥말아먹은 놈이라 생각하지 않으셨겠죠?)

싸우다 지거나 추적당하면 높은 산의 성에 올라
신성일 앞의 엄앵란처럼 '자기야~ 나잡아봐라~'며 궁디짝을 흔들기도 하였겠죠.
저 아래 환인현에서 일상생활을 누리던 고구려인들의 안전을 지켜주던 게 이 오녀산성입니다.



계단을 오르고 환인현을 내려다보고 서문을 보았습니다.
마추피추처럼 기기묘묘하게 쌓은 것은 아니더라도 이 성벽을 만만히 볼 수 없습니다.
정 못믿겠으면 니가 한 번 쌓아보세요.
고구려 망한 후에도 요나라, 금나라도 손 하나 안대고 그대로 사용한 성입니다.



방금 찍은 문에서 더 밖으로 나오니 문과 이어진 성벽이 보입니다.
매우 낮죠? 약해보이죠?
그러나 흙을 패스츄리처럼 겹겹으로 조밀하게 쌓는 판축이나(풍납토성이 그렇습니다)
진흙을 공구리처럼 단단하게 굳히는 중국식 토성도 아니고
돌을 쌓아 만든 벽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낮은 것은 당연합니다. 부숴진 모습도 당연합니다.
접착제를 쓰는 것도 아니니 말이죠.

그렇지만 실제로 사용되던 시기에도 그다지 높진 않았을 겁니다.
아무 것도 기댈 것이 없는 평야의 성이야 높게 쌓아야겠지만
산 자체가 공격자의 체력을 극도로 소모시키고
접근로가 한정된 이상 몇몇 지역에만 화력을 밀집시키면 됩니다.
그야말로 적은 번호표를 끊고 기다리는 은행고객마냥 순서대로 하나씩 쓰러지면 됩니다.
(1번 손님 오세요.. 탕, 그 다음 2번 손님 오세요.. 탕.. -o-b 올레~!)

게다가 높은 데서 아래로 떨어지는 탄도무기(화살이나 돌)
아래서 높은 곳으로 쏘아 올려지는 무기의 운동에너지, 파괴력이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평지성을 공격할 때도 10배수의 병력을 동원하라고 하는데
이런 공격로도 한정되었고 뭘 하는지 뻔히 다 내려다보이고,
수비측의 입장에선 매우 효율적인 방어가 가능하지요.



성문의 안쪽입니다.
문이랍시고 들여보낼 것처럼 해놓고 오지 못하게 하니 이거 낚시터도 아니고
공격자는 짜증낼만 합니다.



다른 각도에서도 한 번 찍어봤습니다.



성문의 모습



끝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은 고구려 축성술의 한 특성입니다.
돌을 쌓을 때 하나하나 미묘하게 각을 주어 둥근 형태로 만들어내지요.
좀 뒤에 나오는 성으로 가면 아예 돌을 둥글게 깎아서 이 지점에 쌓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현대의 군대는 각잡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 당시 군대는 각을 죽이는 것에 몰두하는군요.
병사들만 죽어나는 것은 민족고유의 전통일까요?
(높으신 분들은 모르신다니깐요. 그건 장식이거덩요. - 어느 지온군 기술사관)


안쪽에서 본 서쪽 성문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만난 주거지.
아래 전시관에 복원해놓은 모형이 있긴 했는데
춘추시대로부터 선진시대 하남성 인근의 옛 건물 흉내를 많이 내었습니다.
(사진이 없어 궁금하신 분은 직접 가보세요. 탕~!)
그러나 여긴 1000미터 이상 봉우리만 64좌나 되는 산간지댑니다.
아무리 온화한 날씨 어째도 그건 여기 사는 당신들 생각이고,
RGM-79가 춘천이 살기 쾌적하다 하여도 다들 추운 동네라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죠.
복원이라는 게 만능약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서문쪽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환인현 모습입니다.
원래 파노라마로 맹글어야지..하고 찍었는데
기술력이 없다는 건 깜빡했군요.

내일은 더 부드러운 Gif를 선보입니다. 믿어 의심해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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