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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과연 경덕왕은 실패하였는가..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과연 경덕왕은 실패하였는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9. 25. 13:44

그저께 올린 글에 달린 어설프군 YB님 댓글에 대한 답변같은 글을 올려봅니다.

원래는 어제 올라왔어야 할 글인데

예전에 투탄가멘과 혜공왕을 비교한 글이 있어서 약간 중복이라 좀 주저하다 올려봅니다.

이 소스는 한국사 강의를 위해 만든 교재의 일부분입니다.(결국 자기복제~!!!!!)

단문형식의 원 글을 약간 부드럽게 고치고 몇 부분은 추가했습니다.

하나의 제도가, 생각이 자리잡는데 걸리는 시간이랄까요.

그러한 것들이 정착되는데는 의외로 시간이 걸리기도 합니다.

무리없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는 대개 매우 위급한 상황이라 똥과 된장을 가릴 여유가 없을 때입니다.

삼국통일전쟁기에 참으로 많은 사회적 변화가 생겨나는데 

매우 급박한 상황이라 별 반대 없이 받아들여진 적이 많습니다. 


1. 경덕왕의 왕권강화

경덕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귀족세력 견제와 전제왕권 강화를 위해 

한화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개혁을 단행하였다. 

집사부의 장인 중시를 '시중'으로 변경하고, 국학의 교육을 강화하였고, 

757년 9주·5소경·117군·293현의 고유 지명을, 

759년 관직명을 각각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화정책을 단행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 

국가운영시스템을 중국식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사표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757년 관리에게 지급되던 관료전을 혁파하고 녹읍을 부활시킴으로서 한계를 보여준다. 

이는 중대왕권의 왕권강화책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힘은 여전히 강대하고 저항도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들인 혜공왕대에 779년, 정권을 장악한 김양상ㆍ김경신 등에 의해 

이전 지명과 관직명으로 복귀하면서 경덕왕의 개혁은 부정된다. 

그리고 이듬해 혜공왕은 죽으면서 중대왕권은 붕괴되고 하대로 접어들게 된다.


왕은 옥경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사량부인으로 봉했다. 후비인 만월부인의 시호는 경수태후이며 의충 각간의 딸이었다. 왕이 어느 날 표훈대덕에게 말하기를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얻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하여 주오”하였다. 표훈은 하늘에 올라가 청하고 내려와서 왕께 말했다.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자라면 가능하고 아들이라면 불가하다 하였습니다.” 왕이 다시 말하기 “원하건대 딸을 바꾸어서 아들로 점지해 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상제께 청하니 상제께서 말하기를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표훈이 하계로 내려오려고 할 때 상제가 불러 말하기를 “하늘과 사람 사이를 어지럽게 할 수는 없는데 지금 대사께서는 이웃 마을을 왕래하듯이 천기를 누설하고 다니니 금후엔 아예 다니지 말라”하였다.

그 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기뻐하였다. 태자가 여덟 살 때 왕이 세상을 떠나니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혜공대왕이다. 왕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임조하였는데 정사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막아낼 수 없었다. 표훈대사의 말이 맞은 것이다. 왕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언제나 여자의 놀이를 즐기며 자랐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도사)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혜공왕 16년조에 의하면, 이찬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이를 진압하고 또한 혜공왕은 난병에게 화를 당하였다고 한다- 표훈은 이후에 신라의 성인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 『삼국유사』2 기이2,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조.


2. 여기서 과연 경덕왕은 실패하였는가  

경덕왕의 정책은 어린 혜공왕이 즉위하자 귀족세력에 의해 부정되었다. 

위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어떻게든 아들에게 안정된 왕권을 물려주려단 것조차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강화된 왕권과 체계적인 국가운영시스템의 운영이라는 근본 취지마저 부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하대 왕실에서도 원성왕이나 흥덕왕, 경문왕에 의해 

왕권강화와 유교이념의 확충, 국가체제 정비에 대한 끊임없는 시도가 있었다. 

물론 여전히 강력한 귀족들에 의해 좌절을 겪었지만 

이것은 후일 고려와 조선의 국가운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의도 자체가 부정당하진 않고 결국 그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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