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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대의 지방지배에 대한 잡설..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고대의 지방지배에 대한 잡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9. 26. 12:59

이 글은 어설프군 YB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 글입니다.


우선 전제할 것은 당시의 인구밀도와 개활지와 원시림의 비중입니다.

간혹 고구려의 인구가 1천만이 넘는다는 분들도 계시지만

(만약 오프라인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鳥島, 분유값도 없는 色姬, 무작정 싸지르면 되냐”는 말과 함께 조인트 날라갑니다)

당시의 농업생산력은 고려치 않고 땅넓이랑 요즘 인구분포보고 하는 헛소리는

만류원류고란 책에 실린 말, 폭군 걸왕의 개가 짖는 소립니다.

하다못해 100년전에 1800만동포 2000만 동포라며 만세운동 했어요.

지금요? 남한 인구만 5000만입니다.

하물며 삼국시대에는 그 수확량이 높다는 쌀도 논이 아닌 밭농사로 지어먹던 시절인데요.

무조건 만리장성만 쌓으면 된답디까?

태어나자마자 다 굶어죽는거지.

그래서 인구는 셀려고만 했다면 셀 수 있을 정도로 많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야 세금내고 병역소집 가능한 불알 달린 성인 남자만 중요했고, 

또 행정력이 지금보다 떨어지니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한가지로 지금과 같은 개활지가 드물다는 것입니다.

지금이야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자원의 활용도가 높아진 다음에야

숲은 점차 산으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

그나마도 남아있던 원시림은 씨가 말라버립니다.

(동해안쪽 어딘가에 일부 남아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적어도 남한에서 원시림은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2천 년 전, 1300년 전은 어땠을까요?

오히려 인간의 공간은 숲이라는 지상의 바다 안에 위치하고 있을 거라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희준, ‘삼한 소국 형성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틀’(한국고고학보 43, 2000, 130쪽)의 표를 재구성


위의 표는 한국고대의 마을에서 국가로 이어지는 과정을 도식화한 최고의 그림 중 하납니다.

경북대 이희준 선생이 만드신 도표입니다.

저 그림은 논문 PDF를 캡쳐해서 사용하다보니 그림이 잘 보이지 않아 흉내내서 그려본 겁니다.

촌에 해당하는 마을 하나가 점차 커지며 주변에 분점(?)을 내고

다른 촌과 경쟁하며 먹고 먹히는 과정을 표현한 것인데

그 자세한 이야기야 오늘의 주제는 아니고요

아마 촌과 촌 사이의 공간은 전부 숲으로 채워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이어주는 선은 개활지의 소로가 아니라 

숲과 숲, 혹은 숲을 가로지르는 작은 통로라는 거죠.

다시 생각한다면 저 당시의 촌은 섬이고, 저 선은 항로입니다.

그리고 그 숲이 예전에 한석규가 휴대폰 선전하던 그런 샤방샤방한 숲이 아니라

들어가면 한 치도 앞을 나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습한

그러니까 로마제국 당시의 게르만족과 싸우다 로마 군단 2개가 궤멸당한

슈바르츠 발트(검은 숲)과 같은 곳이라는 거지요.


해놓고 보니 별로군요;;;;


그래서 저 지도에 다시 배경을 녹색으로 처리합니다.

조금 감이 잡히시나요?


그리고 눈 밝으신 분이라면 이상하게 마을이라는 용어 대신 

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데 이질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네, 분명 의도적으로 썼습니다.

고대의, 특히 삼국통일 이전, 아니 본격적인 삼국항쟁돌입 이전에는

지방통치제도가 성-촌제의 형태를 띱니다.

사실 지방이야 일부를 제외하고 중앙귀족이 되는 세력가들의 영역에 속하지만

군사요충지는 성을 쌓고 직접 지배를 하지요.

그 아래 하부단위는 촌으로 불리는데 이는 요즘의 마을과는 개념부터가 다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인구밀도, 개활지를 전면 확대할 여력이 없기에

사람들은 거의 모여 삽니다.

정확한 자료가 없어서 단정할 수 없지만

1~2개소의 성이 면 규모를 관장하는데 그 아래 속하는 촌이 몇 개 없습니다.

광개토왕비의 성과 촌의 숫자를 비교해도 끽해야 7~8개입니다.

그렇다면 이 촌은 지금처럼 넓게 퍼져있는 리/동이 아니라

마치 개척식민지의 전략촌처럼 사람들이 밀집한 구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의 촌을 바다 위의 섬으로 봅니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길은 항로와도 같고요.

나중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군현제로의 발전을 모색하지만

솔직히 그게 얼마나 뿌리박혔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 서류상으로야 군현제 실시지만 실상은 성-촌제에 더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제 생각이 틀릴 가능성도 무척 큽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소도록), 2003, 32쪽


반론으로 신라촌락문서를 들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못한 연령대별 인구분포랑 

지금의 국세청이나 할만한 그들의 재산 소유까지 꼼꼼하게 관리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죠.

게다가 3년마다 개정도 이루어지고 있지요.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것은 왕실이나 관공서 직할촌으로 보는 데는 다 이유가 있기도 합니다.

고대의 지방지배구조를 단순화시킬 수는 없지만 무작정 질서 정연하게 볼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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