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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관우가 동묘로 간 까닭은.. 본문

역사이야기/역사잡설

관우가 동묘로 간 까닭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11. 7. 21:35

지난 주말 처음으로 동묘 앞에 갔다왔다.

정확히는 거기의 옷 매장을 찾아간 것,

10년을 입은 미군 야상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새걸 사러갔다.

동묘는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앞만 지나쳤는데, 

뭐, 그게 어쨌단 말이냐.

요즘 일어나는 일들을 보니 그날 들여다보지 못한 사당의 주인인 관우가 생각났다.


다들 관우를 좋아하지만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장수중 하나다.

삼국지를 하다 잡히면 어지간한 경우 아니면 닥치고 참수하는 경우랄까.

(다만 애로사항이 로리콘장비도 같이 베어야 한다는 것)

그는 일개 무사로서는 훌륭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중요한 책임인 형주를 맡았을 때

그의 실책은 의형 유비의 패업 자체와

3국분립의 안정을 깨뜨려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물론 유비가 이릉이라는 가장 큰 악수를 두었지만)

평소에도 성깔이 드러웠다는 관우의 개인적인 성향에 전혀 한 부분의 책임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행동.

솔직히 그 부분만으로 십상시급이라고 본다.

황제, 영제, 십상시를 제외한다면 말년의 손권 정도나 상대가 될까?


그런 그가 영웅으로 불려야 한다면 조조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은 것,

그리고 죽는 그 순간까지 의를 버리지 않은 점이라 하겠다.

일생의 업적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우금이 낫다.

그러나 우금은 방덕과 달리 목숨을 부지하는 바람에 말년은 치욕스러웠다.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 그 치열하고 갖가지 욕망이 부딛쳐 파열음을 내던 시대에 

관우가 보여줄 수 있었던 미덕이다.


그러나 누구나 관우가 될 수는 없다.

사람이 살다보면 책임져야할 것이 늘어난다.

혼자 욱하고 마구잡이로 저지를 수는 없다.

우리는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니까.

그래서 먹고사니즘도 나오고 눈치를 봐야할 일도 많다.

또, 살다보면 원리원칙으로만 살아갈 수도 없다.

누군가의 평가를 떠나 스스로 얼마나 뼈를 깎아야 하는가..

그걸 알기에 나는 변절은 없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가장 늦게 떠나겠습니다란 말도 하지 못한다.

사육신은 아예 되지 못하고 생육신이 되겠다는 노력이나 할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무척이나 어려운 걸 안다.

오늘, 몇 년째 알고지내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 '사회화 많이 되었네'란 말을 들었다.

다만, 정치적 유전자와 과단성도 없으니 간신짓은 못할꺼라 생각한다.

그래서 남의 변절에 대한 질타도 함부러 하기 힘들다.


공자도 자로와 자공을 가르치던 시절엔 예기 넘치는 좌빨 선생이더니

증자같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나이가 되어서는 온건한 형이상학 선생이 되어있긴 했다.

(더 쉽게 표현하자면 야들야들????)

아주 깐깐한 교조주의자들 같으면 그 사람 변했네란 말하기 딱 맞지만

그래도 이 세상을 어떻게 해야 안정적으로 할 수 있을까란 문제의식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게 김우중을 만난 노동의 새벽이나 오적을 찌르던 손길이 굿판을 향한 생명과

공자가 질적으로 다른 이유다.


사실 관우를 떠올리기 전에 동탁 조지훈의 지조론을 생각했다.

광해군의 즉위 후 밀려난 서인들 중에 변절한 사람의 최후에 대한 부분.

그의 마음 흔들림에 일갈하고 떠난 친구가 반정으로 사형대에 오른 친구를 찾았다.

고기맛을 못잊어 변했으니 저승길에도 한 점 먹고 가라고.

그랬더니 한탄하며 내뱉은 말이 '젊어서, 젊어서 굶주림을 참아라'였던가.


결국 살았던 우금도 조조의 사당에 올라가긴 했다.

배신자의 이름으로.

죽은 관우는 동묘와, 서묘, 남묘의 주인이 되었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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