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제2의 광개토왕비, 그 숨어있는 핵폭탄.. 본문
고구려사를 처음 공부를 시작하면서 했던 맹세가 있는데
절대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것은 건드리지 않는다..였습니다.
100년의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연구사만 추려도 책 몇 권이 나올 것이고
세세하게 따지는 거 잘 못하고 큰 그림만 그리기 좋아하는
19세 여아에게는
그야말로 베트남 정글로 M16 한 자루 들고 들어가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딱 한 번 비문을 통독해보고 다시는 안들쳐 봅니다.
그냥 누가 지나가다 언급하면 그런갑다... 이러는 정도.
그래서 이 글을 쓰는 걸 좀 주저했습니다.
자세한 기사는 아래 링크를 참조해 주세요.
제2의 광개토대왕비'에 무슨 내용 새겨져 있나(연합뉴스 1월 16일 기사)
처음 공개한 중국의 국가문물보의 기사는 여기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듕궉 국가문물보 기사(1월 6일자 기사)
단 듕궉 간체라 그냥 그런 기록이 있다 정도의 확인용. -_-;;;
위의 연합뉴스기사에서는 깨지는 간체를 좀 바꿔서 실었습니다.
출처 : 중국문물보 인용기사
□□□□世必□天道自承元王始祖趨牟王之創基也
□□□子河伯之孫神□□□□蔭開國闢土繼胤相承
□□□□□□烟戶以□河流四時祭祀然□□備長烟
□□□□烟□□□□□富足□轉賣□□守墓者以銘
□□□□□□□□□太□□□□□王神□□與東西
□□□□□□追述先聖功勛彌高悠烈繼古人之慷慨
□□□□□□□□自戊□定 律敎□發令□修復各於
□□□□立碑銘其烟戶頭卄人名□示后世自今以后
守墓之民不得□□更相轉賣雖富足之者亦不得其買
賣□□違令者后世□嗣□□看其碑文與其罪過
어제 지인과 신문기사를 보며 대충 풀어주며 설명한 것을 여기에서 간략히 옮겨봅니다.
뭐 사전을 찾아본 것도 아니고 그냥 눈에 들어오는 것으로
대략의 흐름만 알고 가는 정도로 여겨 주세요.
(뭐 올 상반기 안에 이것에 대한 학술대회 하나 열리지 싶네요.
아마 빠르면 고대사학회에서 상반기, 늦어도 여름에 하나 열 것 같습니다.
정확한 내용은 그때를 기다려 봅니다)
첫줄의 앞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뒤의 문장을 통해 추측하자면
뭐, '(우리 고구려는) 대대로 하늘의 도를 계승한
시조 추모왕께서 세운 것이다' 정도가 될겁니다.
요건 고구려의 역사적 장구함, 정통성을 알리는 선언적 문구랄까요.
2번째 줄은 '(우리 시조왕은 천신의 자손) 하백의 손자~ 나라를 열고
영토를 개척하여 자손 대대로 대대로 이어져왔다'.
요건 고구려왕의 정치적 정통성은 추모에게서 유래한 것이라는 또하나의 선언.
셋째줄에 들어가면 광개토왕릉비나 신라촌락문서에 나오는 골아픈 단어가 나옵니다.
연호烟戶, 앞에서 광개토왕릉비를 안건드리겠다는 맹세를 했다고 했는데
또다른 베트남 정글이 이 촌락문서입니다.
솔직히 이 연烟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건 당시의 주민을 편제하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겁니다.
요 단어를 다루는 박사논문이 몇 편, 학술지에 실린 놈문만 수십편.. 아 싫다..
다만 연호라는 단어를 그냥 두고 문맥만 본다면
(무덤 관리를 맡은) 사람들(이들을 수묘인이라고 부릅니다만)이
사시사철 제를 지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제 능참봉이냐는 말을 들었는데 그보다는 세습되는 역役입니다.
삼국시대 위나 고려 때는 군인도 세습신분이었지요.
아버지가 군인으로 편제되면 나도 군인, 아들도 군인..
대대로 무덤을 관리하는 일에 종사하며
여러 집들이 자기들이 먹을 것과 무덤관리에 들어갈 비용을 조달할
땅을 소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것으로 운영하는 일종의 독립체산제 조직이랄까요.
처음엔 이것도 나름 자랑스런 임무였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마치 조선시대 역驛의 관리자들처럼 목줄 걸린 신세가 죄지요.
다음 줄은(요기부터 좀 자신감이 대폭 백색왜성 수준으로 축소됩니다)
부유함에 대한 글자와 사고파는 내용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지위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식의 내용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고팔지 말라는 내용이겠지만
수묘인에 대한 글을 하나도 안읽어선지 요 내용은 좀 자신이 없네요.
게다가 요 부분은 고구려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어
더 깊은 이야기는 드릴 수 없는데
너그러우신 언니 옵하들은 ' 저 어린 것이 여기까지 읽다가 병원가겠네'라
이해래 주실 거여요. 헤헷~☆.
그런데 요 비문의 또하나의 폭탄은 律敎□發令라는 단어입니다.
앞의 定자와 어떻게 연결되는 가는 상세 자료가 나와야겠지만
읽기에 따라서 정해진 율령에 따라서라고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고구려에서 율령은 소수림왕대에 제정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과
아마 진의 태시율령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정도로 언급되는
고구려 율령 연구에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지요.
물론 광개토왕릉비에 수묘인에 대한 규정이 적혀있지만
그것이 하나의 법 체계안의 규정이냐의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마치 단양적성비에서 나온 '적성전사법'같은 규정이
존재했을 수도 있었다는 가정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왕의 교시 정도로 다룰 수도 있지만
율령을 세우고 공표한다는 식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단, 이 문제는 학계의 심도있는 연구가 있으면 결론이 내려질 것이라고 봅니다.
(19세는, 19세 청순가련 병약미소녀는 기다릴 수 있어용!)
만약 이것이 율령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 비석의 발견은 단순히 제3의 고구려 비석 발견 이상의
핵폭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집안고구려비라고 표시된 곳이 이 비석이 발견된 곳입니다.
말꼬리 ----------------------------------
어제 지인과 대화를 하며 작년에 발견된 것인데 왜 이제 이야기할까
처음엔 그게 더 궁금했습니다.
학계에서 중국 정보를 실시간으로 구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특히나 인용할 연합뉴스 기사에 이름이 거명된 분들이
그런 거 안찾고 게으름 피울만한 분들이 아닙니다.
이름이 거명되진 않았지만 다른 분들도 열심히 자료를 찾습니다.
그리고 중국학계가 아주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무장해
더러운 동이족 오랑캐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이러지도 않고요.
(입장 차는 크지만 결국은 그들도 학자입니다)
작년에 발견 된 거 그동안 몰랐다.. 이건 말이 안됩니다.
아니면 뭔가 지금 터트려야할 뭔가가 있는가..
경주에서 금관 하나 나오면 신문 1면을 장식하던 시대는 아니고요.
(설령 그 가족 중 하나가 뭐가 되더라도 다른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학계에서 가지는 상식은
먼저 학계인사들에게 공개하고 언론 공개를 한 후에
우리로 치면 문화재청 산하 문화재연구소 같은데서
보존처리나 정밀조사를 하지요.
그런데 작년에 발견된 것이 지금 공개된 것은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아마 중국에서는 정밀조사를 거친 후 공개를 한다고 봐야
이번 공개가 합리적으로 설명됩니다.
공안들이 있어서 안쪽은 못찍게 하더군요. 사실 찍으라고 해도 찍기가 어렵긴 했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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