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만리장성 늘리기, 이대로 좋은가 본문
이 환도성도 이젠 남의 것, 우리 그냥 처용처럼 춤이라도 잘춰야하나.. 출처는 직찍.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131715&cp=du
한 10년전인가 고구려에 대한 세미나가 있어서 모 학회 행사에 간적이 있습니다.
갔더니 학생급은 하나도 없이 전부 원로급들만 있어서
짬에 따라 맨 앞에서 모든 발표를 들어야 했죠.
졸지도 못하고, 토론시간 되니 제일 만만하다고 녹음기주며 녹음하라 그러고
(여담이지만 그 학회 행사는 단행본으로 항상 묵직하게 나오는데
그날 세미나 분량만 토론녹취가 생략되었습니다. 녹음기를 잘못 만졌나봐요...)
그날의 모든 발표중에 제일 인상적인 것이 부여의 위치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고고학하곤 담을 쌓은 인간이 제일 인상적인 게 뭐였냐면
고구려의 뿌리인 부여가 길림성에 있나, 흑룡강성에 있냐로 두 지역 학자들이 으르렁거리는 가운데
그날의 발표자가 어느 지역을 지표조사로 둘러보고는 여기가 부여 고지라고 말해버렸어요.
10만평이었는지, 10만 평방미터인지.. 하여간 10만 단위의 지역을 조사하며
토기랑 돌 몇 개 나왔다고 바로 비정해버리는 아름다운 직관에
대충 선생님들따라 지표조사 몇 번 따라가본 게 전부인 인간이 감동을 안먹을 수 있나요.
뭐, 삼국지 팬들은 아실만한 제갈량의 은거지가 어디냐 논쟁은 여기에 비하면
일본의 동경대학파랑 교토대학파의 중세사 논쟁만큼이나 매우 정교한 학술토론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면 중국을 성토하는 분위기이긴 한데
그렇게만 한다면 과연 옳은 것이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단순히 영토확장, 역사왜곡..이라고 단순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이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그리 단순하진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 그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딱 메소포타미아의 사르곤이나 길가메쉬, 아수르바니팔 수준입니다.
그러나 유인 우주선을 띄우는 딱 세 나라 중 하납니다.
그런 그들의 복잡한 사정이 이런 일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북공정에 개괄은 알아서들 검색해보시면 나올겁니다.
여기저기서 언급하고 개설서 비스무리한 것도 여러권 나온 마당입니다.
다만 그 배경 중 빠진 이야기랑 뒷이야기만 하죠.
먼저, 중국의 가장 큰 고민은 소수민족의 문젭니다.
공식인구 중 92%가 한족이지만, 전체 영토의 일부만 차지합니다.
전통적인 농업경제에서는 우월한 지위지만 2,3차 산업으로 중심이 바뀐 이후에는
이놈의 소수민족이 가진 땅이 알짜배기입니다.
등소평이나 그 후계자들이 제일 겁내던 게 소수민족의 독립이죠.
역사적으로 한 성격하는 신장위구르나 60여년전 강제로 점거한 티벳이 독립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날마다 13일의 금요일이고 온세상은 처키가 텍사스제 전기톱을 휘두르는 세상이 됩니다.
그래서 다민족통일국가론같은 역사이론이 팽배하는 게 그렇습니다.
150여년 전에 신나게 두들겨맞은 기억과 맞물려 그들은 신경과민 상태입니다.
어떻게든 역사적으로라도 정당성을 부여하겠다는 게 그들 생각입니다.
(아, 느브갓네살이 칭구, 1촌 맺자고 달려올 듯합니다. 좋아요를 남발하며...)
그래서 80년대부터 이론을 정비한 그들은
사방천지가 다 지들꺼라는 역사이론정립 프로젝트를 가동합니다.
동북공정, 서북공정...
보천지하 막비왕토普天之下 莫非王土, 무릇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곳 없도다
딱 시경의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니 되돌아가고픈가.
구소련의 붕괴 이후 그들은 이 공정들을 본격적으로 가동하는데
그 움직임에 대한 동향은 바로 전해졌습니다.
1990년엔 이전복과 왕옥량의 "고구려간사"가 삼성출판사에서 출간,
1992년에는 서강대 김한규 선생의 동북공정 소개논문이 동아연구에 실렸고
같은 해에 동북공정의 핵심 원리를 제공한 손진기의 "동북민족원류"가 동문선에서 번역되었죠.
특히 이전복과 왕옥량의 저서는 중국이 고구려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처음 소개한 책인데
다른 시각이 아쉽다는 역자의 서문 정도의 반응에 그쳤습니다.
그러다 2001년 연말이었던가 02년 연초였던가 고구려사를 주제로 한 세미나에서
중국의 고구려사 인식에 대한 논문이 발표되며 동북공정이 한국사회에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이미 동북공정은 완료된 상태에서 때늦은 반응이었습니다.
일개 학생이 저 위의 책 초판본을 바로 사서 보았는데 말이죠.
다들 중국의 헛소리로 생각하다 그 논문이 발표되었을 때 처음 알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걸
현장에서 봤는데 황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이후 과정이야 아실만한 분은 아실테고
그 전까지 고구려사로 박사논문 나온 게 12편인가 그랬는데
조선시대 연구자들까지 고구려사 논문을 쓰는 광풍이 몰아쳐
그때 막 생성되던 고구려사연구자들이 많은 피해를 봤다고 개인적으로 봅니다.
무령왕릉이 백제사연구자 육성의 모태가 된 것처럼
조선일보의 아 고구려전 전시와 막 개방된 중국여행이
젊은 연구자들에게 연구방향을 제시해서 막 싹이 트려던 시절이었거든요.
(다행히 제 주제는 초 마이너라 아무도 안건드려서 다행이었습니다. 캬캬캬)
그러나 우리도 마냥 피해자는 아닙니다.
동아시아의 역사왜곡 전쟁에서 우리만 항상 순결한 피해자인양 포장들을 하시는데
양 옆에서 두들겨 맞다보니 때릴 찬스가 없던 거지
나이트 열번 갔냐와 세번 갔냐의 차입니다.
세번 간 게 열번 넘게 간 애보고 '음탕한 놈'이라고 부를 자격이나 있나요.
고구려 벽화가 처음 공개되던 당시에는 너도나도 민족주의적으로 돌변했습니다.
중국 신화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책만 봐도 알만한
소머리의 염제 신농씨가 벼이삭을 들고 날아다니는 것을
고구려인의 농업신이라고 하질 않나 중국의 태양신이 우리의 상징으로 변하지 않나
실제로 중국학자들과 벽화를 직접 보는 자리에서 이거 다 우리 것하다가
중국학자들을 엄청 자극시켜버렸죠.
가뜩이나 묘한 얘길 하는 양반들의 스위치를 돌렸습니다.
(요건 정재서 선생의 "동양적인 것의 슬픔"에 소개된 일홥니다)
우리야 그 땅 되찾으면 좋고 아님 말고에 가깝지만
백두산에서 태극기 흔들어대며 동이족은 우리 조상, 만주는 우리 땅 노래만 불렀지요.
(중국사의 동이와 우리의 동이는 전혀 다릅니다.
빌어먹을 큐베범엽이 후한서에서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모두들 낚..)
하여간 가뜩이나 신경 곤두선 놈들과 어떻게 싸워야할까 고민하기 보다
감정만이 앞서다보니 점점 희한한 일들이 양산되기도 했습니다.
일본 정도의 크기만 되어도 70만년전 구석기설같은 어거지는 정화가 됩니다.
그런데 전인류의 1/4을 차지하는 애들이 집단으로 그러면 이건 정리가 안됩니다.
우겨도 한두 놈이 우겨야지요.
중국땅의 1/4, 핵심 알짜 땅을 빼앗긴 와중에도 장개석은 일본에게
우리 5억 중국인이 해안가에서 볼 일만 봐도 니들 섬은 가라앉는다는 호기를 부렸습니다.
우리가 그러면 허세지만 중국이 그러면 직면할 공포입니다.
저 위에 인용한 기사에선 박작성이나 요동성도 만리장성..에 놀라고 있지만
손진기의 책에선 (읽기에 따라서) 한강 이북지역의 거주민은 원래 한국인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들어서 단일민족으로서 형성되었다고 하죠.(이 행간을 생각해주세요)
아직도 욱해야 할지 냉정하게 궁리해야 할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물론 너무 큰 상대지만 넋놓고 있다가 당하는 거 보다야 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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