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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중천왕 4년 - 질투하면 죽는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중천왕 4년 - 질투하면 죽는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3. 26. 19:30

원문

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椽氏恐其專寵 乃言於王曰 妾聞西魏求長髮 購以千金 昔我先王 不致禮於中國 被兵出奔 殆喪社稷 今王順其所欲 遣一介行李 以進長髮美人 則彼必欣納 無復侵伐之事 王知其意 默不答 夫人聞之 恐其加害 反讒后於王曰 王后常罵妾曰 田舍之女 安得在此 若不自歸 必有後悔 意者后欲伺大王之出 以害於妾 如之何 後 王獵于箕丘而還 夫人將革囊迎哭曰 后欲以妾盛此 投諸海 幸大王賜妾微命 以返於家 何敢更望侍左右乎 王問知其詐 怒謂夫人曰 汝要入海乎 使人投之


해석

4년 여름 4월 왕은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고 서해에 던지게 하였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긴 머리가 9척에 달하여 왕이 총애하여 장차 소후로 세우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녀만 사랑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에 왕에게 이르기를 "첩이 듣건대 서위에서 장발(미녀)를 찾아 천금을 걸고 산다고 합니다. 옛날 우리 선왕의 대에 중국에 예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의) 군사를 맞아 출분하게 되니 사직에 큰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지금 왕께옵서는 저들이 하고자하는 바에 따라 일개 사신을 보내어 장발미인을 진상하게 하면 즉 저들은 필히 받을 것이라 다시 침범당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은 그 뜻을 알고 가만히 답도 하지 않았다. (관나)부인이 이를 듣고 그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왕비를 헐뜯으며 말하기를 "왕후께서는 항상 첩을 욕하며 말하기를 '천한 여자가 어찌 이 자리를 넘보려고 하느냐.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필히 후회할 일이 있으리라'라 하십니다. 생각해보니 왕후께서는 대왕께서 출궁하신 틈을 타서 소첩을 해하실 겁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후일 왕이 기구에 사냥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인은 가죽주머니를 들고 나와 맞이하며 슬피 울기를 "왕후께옵서 첩을 이것에 담아 바다에 버리려 하셨습니다. 만약 대왕께옵서 첩의 하찮은 목숨 살려주신다면, 이에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찌 감히 곁에서 모시길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노하여 부인에게 말하기를 "네가 바다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구나"라며 사람을 시켜 던지게 하였다.


좀 기네요.. 무려 3쪽을 자르고 붙이고...

여러 책에서 삼국시대의 율령반포를 중요하게 말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 고대사회의 법은 그렇게 후한 것은 아닙니다. 살인에 대해선 반드시 죽인다거나 도둑질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보상을 요구하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예속민으로 만들어버리며, 전쟁에서 진 장군은 처참한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요건 삼국시대 후반에 이르면 사라진 듯 합니다만..) 


자칭 합리적이라는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지요. 저런 악법을 만든 것을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다니,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현대가 아니죠. 그보다 앞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본적인 규칙도 없다거나 변변치 않았을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적어도 동일 사안에 대해 그때마다 다른 판결을 받을 확률이 그만큼 적어진다는 겁니다. 사실 이정도만 해도 인류문명의 일대 진전이라고 할 수 있죠. 


요즘 다루고 있는 동천왕의 시대의 상황을 기록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고구려전을 보면 꽤 엄격한 법조항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조에는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諸加들이 모여서 評議하여 사형에 처하고 妻子는 몰수하여 奴婢로 삼는다."라고 하여 간략히만 언급하고 있는데 같은 책의 부여조를 보면 "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 사람은 적몰하여 奴婢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도둑질한 물건의] 12배를 변상케 했다. 남녀 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모두 죽였다. 투기하는 것을 더욱 미워하여 죽이고 나서 그 시체를 나라의 南山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그 부인의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내어준다. 兄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는 匈奴의 풍습과 같다." 이런 제세한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단, 부여의 기록을 고구려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인가란 질문을 던질 수가 있습니다. 대략의 풍습은 부여와 유사하다고 하지만 세세한 부분의 경우 다른 면이 좀 많거든요. 그러나 나중에 나오는 『주와 구당서의 기록을 보면 거의 유사합니다. 그러므로 3세기 무렵의 두 나라의 법률은 거의 비슷하다고 봐도 될 겁니다.


특히나 부여의 기록 중에 투기하는 여인을 엄벌한다는 것은 독특한 풍습으로 관심을 받은 주젭니다.(그런데도 논문이 거의 없음은 또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지요) 이 부분은 고구려 기록에는 없었는데, 삼국사기에 유사한 사례의 기록이 실려있지요. 그것이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관나부인의 이야기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배층의 남성의 사생활은 그야말로 무제한 고속도로와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남자는 여자들보다 우위에 있고, 지배층으로 올라갈수록 그 우위는 절대적이 됩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 시대의 여성들은 남자의 성욕을 처리하거나 애를 키운다거나 가정을 관리하는 것 이상의 자리를 가질 수 없었어요.(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따금 강한 여자들의 이름을 들고 오시는 분들이 있는데.. 음.. 그게 흔한 일은 아니었잖아요. 신라의 여왕들도 솔까말 바지사장이었고) 그런 점에서는 이웃 섬나라의 이상야릇한 야애니 이상의 해석은 없을 겁니다.(여자는 다 봉선화냣!) 그러나 거기에도 한도라는 것이 있지요. 조선시대에 여자들에게 칠거지악이라는 개뭐시기같은 족쇄가 있었다면 남성들도 삼불거라는 법조항이 있었으며, 과도한 축첩과 엽색은 지탄을 받을 일이었으며, 양반들과 달리 이혼, 재혼이 자유로운 평민들의 결혼은 개들이 아무 개와 교접하는 것과 같다는 욕을 먹었지요. 


고대로 올라가면 어떨까요? 

그 시대 평민들의 삶은 잘 알 수 없으니 

지배층으로 한정한다면 어떤 제약이 있었을까요? 

아마 거기에 정치적인 면과 현실이 다 족쇄가 되었겠지요. 

워낙 신분의 개체수가 적다보니 

어느 한 명이 다 독점하면 안생기는 우울한 인생이 늘어날텐데.. 

그들이 가만히 박수칠 일은 아니죠. 

그러니 완전 독점은 있을 수 없고, 

또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혼을 해야하는 사정은 더 빡빡할 겁니다.


왕의 권력이 아직 단단하지 않고, 

그저 가장 강한 대장에 불과하던 시절로부터 

왕권이 성장해가던 시절에 등장한 제도가 왕비족일 겁니다. 

아직 초월적인 권력을 갖지 못한 왕이 유력 집단을 런닝메이트로 삼는 겁니다. 

결혼을 매개로 자신의 부족한 힘을 채워서 국정에서 지분을 크게 만드는 겁니다. 

이를 통해 교섭 상대를 한정하고 다른 집단보다 우위를 점한 다음, 

때로는 조선의 숙종이 했던 것처럼 왕비의 선택을 바꿔서 충성경쟁도 시킬 수 있지요. 


그러나 이 시대에는 그저 결혼도 정치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국상이 된 이래

고구려의 국왕과 종치적 동지관계를 맺은 것은 연나부였을 겁니다.

앞에서 그동안 이야기한 산상왕의 결혼과정도

연나부의 존재 없이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을 깨고 싶어합니다.

왕을 끄집어내릴 수 없다면, 2인자라도 되어야 합니다.

어쩌면 주통촌의 꽃다운 짐순이스런 아가씨 이후

관나부는 내심 야망을 품었을 법도 합니다.


위 기사는 왕, 또는 왕실을 두고

연나부와 관나부 사이의 치열한 물밑 경쟁 중 한 단면일 것입니다.

얼핏보면 그저 그런 궁중사극 같지만

이것도 나름 표면에 여성들을 두고 그저그런 치정싸움 같이 보이지만

물밑은 잠수함과 잠수함이 서로를 향해 어뢰를 발사하고

서로의 빈 틈을 파고들어가는 치열한 전장입니다.

아마 여성들 못지 않게 남자들의 싸움도 치열했다고 봅니다.

어쩌면 중천왕 즉위년에 그렇게 사랑받은 동천왕의 다른 아들들,

그러니까 중천왕의 동생들이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은

그런 행간을 가진 이야기일지도 몰라요.


관나부인이 총애를 받자 왕후는 서위, 그러니까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팔며, 

관구검의 침입으로 인한 동천왕의 고난 이야기를 언급하며

그녀를 정치적으로 거세하고자 하고 

왕은 가만히 묵묵부답으로(단 한글자가 빠진 그 단어 그대로) 대처합니다.

그러자 관나부인은 그에 대한 반격으로 

당신과 나의 사랑을 왕후가 방해한다는 말을 합니다.

언젠가 나는 당신이 없을 때, 제거당할꺼야.

당신이 돌아올 때, 나는 차가운 몸으로 맞이하겠지..

그리고 조금 있다가 정말 부인은 가죽주머니를 들고 최후의 반격을 가합니다.

왕은 오히려 그녀를 거기에 담아 바다에 던져버리죠.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가, 왕비가 죽이려하였는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왕은 연나부의 손을 들어주었다입니다.

연나부와 관나부 사이에 어떤 저울질이 있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만약 알아오라고 타임머신을 만들어주신다면,

짐순이는 주말로 건너가 로또번호를 알아올 것이어요!!)

아직, 관나부의 날은 오지 않은 걸까요?


앞에서 부녀자의 질투를 엄격히 규제하는 법률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축첩이 가능한 사회에서 질투를 가지고 죽인다..

아무리 남자의 궈난이 극대화된 사회도 보통은 그렇지 않죠.

저 기사를 단순히 남녀간의 높낮이로 보면 표피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질투를 하는 쪽은 어차피 남자에게 버림을 받거나,

사랑을 빼앗긴 쪽입니다.

남자의 힘이 그토록 강하다면 버리면 그만입니다.(잔인하지만)

꼭 죽여야하고, 

여자의 친정에서 시체를 인수하는데 절차가 그토록 복잡할 필요가 없어요.

걍 '너, 껒여!'라고 하면 됩니다.

정치적인 서열이나 권력의 분배관계를 어지럽힐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그렇게 과한 처벌이 필요할까요?
너무 정치적인 해석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시대의 남녀간의 사랑도, 결국은 정치입니다.


말꼬리 -------------------

위에서 인용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 중국정사 조선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오늘 기사에서 왕후와 관나부인의 대사의 일부에서 막히는 부분은

네이트 한국학의 기사를 일부 참조 했습니다.


삼불거는 돌아갈 친정이 없을 때, 부모의 제사를 지내줬을 때, 

가난했다가 부자가 되었을 때는 아내를 버릴 수 없다는 규정입니다.


본격적인 산상왕과 동천왕 연대기의 절정으로 치닫기 전,

좀 긴 글로 전의를 고취시켜본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이것도 땜빵선발이라는 건 모두에게 비밀~.(켁! 천기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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