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집안 고구려비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본문
http://www.ccrnews.com.cn/a/xinwengonggao/news/zonghexinwen/2013/0129/44311.html
얼마전에 집안에서 새로 출토된 고구려 비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오늘 고대사학회에서 열린 이 비에 대한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위의 글대로라면 6편의 논문이 발표될 예정이었는데
이 비석을 조사한 중국학자들의 발표가 추가되면서
총 8편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며칠전에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비공개 간담회가 있었고,
중국에서 막 펴낸 자료집도 알려진 상황이고,
요 며칠 동안 신문에서는 고구려비문에 대한 기사가 연달아 실려
이래저래 분위기가 고조될 것으로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시작된 세미나는 초반부터 만석이라
아침에는 밖에서 아는 분과 이야기하며 보내다
점심을 먹고서야 겨우 자리를 잡았습니다.
방송사 기자들은 아침에 들렀고,
신문사 기자들은 끝까지 남아 있더군요.
처음 소개글에 실린 판독문은 1차로 발견된 것입니다.
이후 중국에서도 좀 더 조사가 진척되었고,
한국학계도 고구려 발해학회 차원에서,
고대사학회도 학회차원에서 공동으로 분석하고 조사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사실 현장 실사와 같은 실물조사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제대로된 탁본을 구할 수도 없었던 상황에서 연구가 진행된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각에선 이 비석 자체가 후대의 위작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선 짐순이는 말을 아낄 수 밖에 없네요.
워낙 금석문에 약한 터라(한문 실력이 딸린다는 말에 아주 점잖은 표현 ;;;)
사실 오늘 세미나를 듣는 것은 고역이었습니다.
오히려 중국 수묘제에 대한 발표가 가장 쉬웠달까요.
(또, 이러면 누군가는 조낸 무시한다라고 오독하겠지만..)
사실 맨 처음 올린 글이 가장 던질 수 있는 한계에 근접했습니다.
다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이게 베트남 정글로 가는 이로코이즈 헬기라는 기분만 들더군요.
기본적으로 고구려의 수묘제나 고국양왕의 종묘 설치기사 등 뿐만 아니라
광개토왕 시기를 전후로 한 고구려의 왕계인식에 대한 문제까지 건드는 것이라
저 비문의 판독이 매우 정확하다 할 경우에도
몇 년간은 피터지는 싸움이 되지 싶습니다.
오늘 발표 중에서 이 비문을 풀어쓴 부분이 있는데 참고 삼아 올립니다.
(해석문은 한국외대 여호규 선생님 발표문 136쪽의 것입니다.
판독에 필요한 행과 열을 표시하는 기호를 빼고, 틀린 조사하나만 수정했습니다.
그 외에는 착오의 우려가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율령문제가 사실 관심 분야였는데 전에 날림으로 한
짐순이 해석은 근본적인 끊어읽기부터 잘못이었더군요.
□□□□世, (天帝께서) 필연적으로 天道를 내려주시니, 스스로 元王을 계승하여, 始祖 鄒牟王이 나라를 개창하셨도다. (추모왕은) 日月之子 河伯之孫으로 神靈의 보호와 도움을 받아 나라를 건국하고 강토를 개척하셨다. 後嗣로 이어져 (王位를) 서로 계승하였다.
□□□□各墓烟戶, 이 하천의 물로 四時에 祭祀를 거행하였다. 그렇지만 (수묘제가) 갖추어진지 오래되니 烟戶△□□, 烟戶가 열악해지고 쇠약해져서 팔리거나 되팔리는 자가 많아졌다. 이에 守墓者를 □하여 □□에 새겼다. □□□王, □岡上太王, □平□△王 등의 제사시설이 망실되어 ‘東西」 △□□□世室’을 作興하고 ‘先聖의 功勳이 아주 높고 매우 빛나며 古人의 굳센 의지를 계승하였음’을 追述하였다.
□□□, 好太△王이 이르시기를, “戊子年에 (守墓)律을 제정한 이래로 敎를 내려 令을 발포하여 다시 (수묘제를) 수복하였다. 각 先王의 墓上에 비석을 건립하고 烟戶의 戶頭 20명의 명단을 새겨 후세에 전한다. 지금 이후로 守墓之民은 함부로 사거나 다시 되팔지 못하며, 비록 富足之者라도 사거나 되팔 수 없다. 만약 령을 어긴 자가 있으면, (산 자는) 후세토록 □□를 繼嗣하도록 하고, (판 자는) 碑文을 보아 罪過를 부여한다.”
짐순이도 지난번 고구려발해학회의 발표문과 오늘 발표문을 꼼꼼히 읽어보고
좀 정리를 해봐야 겠습니다.
수묘守墓나 연호烟戶와 같은 일부 용어를 설명해야 하지만
솔직히 연호烟戶, 연烟의 개념은 짐순이도 소화하지 못한 영역이라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_-;;
말꼬리 --------------------
위에 인용된 문성재 선생님의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본 학회 발표에서는 약간 유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단은 실존 비문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중국학계의 조사를 신뢰하는 선에서 진행한 것임을 전제로 합니다.
뭐, 아무리 중국학계를 신뢰하기 어려운 면이 있지만
기본적인 자료의 선에서는 어느 정도 이런 자세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잠시 언급된 것 중에
고구려에서 도교수용의 연대보다 더 이른 시기에 나왔다는 ‘천도’ 용어에 대해서
그것은 제자 백가 시절에도 각 학파에서 많이 사용한 용어라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그 점은 짐순이도 동의하는 바이며
또 도교라는 종교의 탄생연대를 생각해본다면 조금은 억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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