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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성곽이란 무엇인가 02 - 성곽의 시작..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성곽이란 무엇인가 02 - 성곽의 시작..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5. 17. 23:08

성곽이 처음부터 그렇게 대단한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뭐든지 처음부터 찬란한 건 없어요.

(언젠가 써먹을 게 줄어들면 아껴둔 이 명제에 반하는 일 이야기를 할 껍니다만..

지금은 거기까지 공부하기엔 짐순이의 귀차니즘은 숭고해욧!)

처음부터 폼이나는 건 그다지 없었어요.

오늘은 그 창세기랄까요.

웅장한 성벽과 달리 창세기의 방어시설은 어떠하였는가를 이야기해봅시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에겐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애시당초 후대의 단단한 흙이나 돌, 그리고 벽돌로 쌓은 것과 달리

창세기의 방어시설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주 부서지기 쉽거나 썩기 쉽거나

구조가 간단하고 엉성하여 역사의 풍화작용에 의해 사라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여기에 대한 정보를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아요.

한국의 고고학자들은 울주 검단리 이후 풍납토성이나 

여러 곳에서 초기의 방어시설의 흔적을 찾아냅니다.

그러나 그건 2D의 도면을 보며 3D로 해석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거고

우리는 어디 박물관에 전시된 미니어처를 잠시 스쳐가듯 보는 게 답니다.


과연 과거의 현장감에 넘치는 자료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사실 하나 소개할만한 게 있었는데 어디다 뒀는지 생각이 안나요.

그거 스캔도 떠놨는데. 데헷~!)

그러나 우짭니꼬. 예까지 왔는데(네가 84년 최동원이냣!)

일본 큐슈의 요시노가리라는 고대 유적에서 많은 자료들이 나왔고

또, 그 유적은 매우 충실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걸 칭찬하는 당신, 바로 앞 글은 어떤 글이더냐!!)


출처 : 요시노가리. 일본속의 고대한국(중박특별전 도록, 2007, 57쪽)


야요이시대에 해당하는(BCE.3C~CE.3C) 시대의 요시노가리는 

복쪽의 뭔가 중요한 구역과 남쪽의 그보단 조금 덜 중요한 구역으로 나뉜 

방어시설로 둘러싸인 곳이 발견됩니다.

이 사진은 그 북쪽구역인 북내곽의 항공사진입니다.

어느 거인이 큐슈로 진격해서 직찍했어요...(퍽!!)

언덕 위에 빙 둘러 목책(사진 속의 검은 선)을 두르고 그 뒤에 환호를 팠군요. -_-;;

보통은 환호 뒤에 목책을 두르죠.

이건 아마 제의장소라고 추청합니다. 


진격의 거인, 또는 나우시카의 거인병 촬영;;. 위의 책과 동일. 59쪽


이건 다리따윈 장식인 줄 모르시는 분들이 거주공간으로 보이는 남내곽입니다.

거인은 이것을 찍다가 야요이인들의 창을 맞을 뻔..(고마해!!!)

목책 바로 뒤에 환호가 있어요.

보통은 환호가 1차 접근을 막고 성벽이 차단한다는 게 기본적인 상식인데

뭐, 이거야 목책이 단순한 울타리의 역할을 할 뿐,

후대의 성벽처럼 사람이 올라가지 못하니

그런 입체적인 전투는 안될 것이라 생각해야 겠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전투보다는 더 단순하고 

(후대의 시각으로는) 엉성한 것이었을테니까요.


진격의 짐순이가 요시노가리를 침략해 찍은 사진, 환호에 빠진 순간..(고마해) 동일출처 63쪽


자꾸 환호라는 말을 쓰는데요.

만약 이런 성곽에 고나심이 많으시다면 해자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이 계실 겁니다.

몽촌토성 주변을 두르고 있는 물 웅덩이,

또는 서영 성에서 항상 나오는 주변 구덩이를 해자라고 부르죠.

성벽도 훌륭한 방어시설이지만 

그래도 공성무기와 공격병의 노가다는 위협적이니까

또 둘레에 물웅덩이나 그냥 구덩이를 깊게 파서 

공격측의 공격을 둔화시키고, 성벽에 나방처럼 달라붙는 걸 저지하는 시설이지요.

목책같은 구조물보다 더 오래된 것이기도 합니다.

고고학에서는 초기의 해자같은 시설을 환호라고 부르죠.


처음에는 간단히 '나와바리'를 표시하는 것으로부터

맹수들의 침입을 막는다거나 하는 용도로 만들어지다가

점차 인간 집단간의 갈등이 더욱 심해지면서 더욱 깊고 넓은 형태로 진화하지요.

한반도는 거의 산성에 의존하는지라 환호나 해자를 파지 않게 되지만

(그러기엔 비용대비 효과도 적고, 한반도의산은 토층이 얕아 만들기도 어려워요)

고구려의 평양성이라거나 백제의 풍납토성, 부소산성처럼

흐르는 강 자체를 해자로 삼아버리는 현태로 잔존합니다.


고고학 하시는 분 말을 들어보면

꽤 이른시기부터 나무와 풀로 지은 집이 불에 탄 흔적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고 합니다.

개중에는 그야말로 인간의 실수에 의한 불도 있지만

전쟁이나 조직적 방화같은 흔적도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중국의 초기 취락의 경우 입구를 마을의 중앙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뭐, 한반도 남부 어딘가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마을유적 또는 무덤에서

몸에 화살촉이 꽃힌 상태로 매장된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지요.

모두 점점 가혹해지는 인간집단의 갈등- 이걸 전쟁이라 부르죠-에 대한

아주 오래전 사람들의 나름의 대책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반도의 고대 마을을 그린 그림 하나 올려봅니다.


출처 : 우리역사박물관 1권(대교, 2006, 48~49쪽) 누르면 좀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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