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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천왕 20년 - 옥저, 여기가 나의 적벽이다.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동천왕 20년 - 옥저, 여기가 나의 적벽이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5. 21. 15:47

- 원문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犒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胷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淥·杜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 해석

왕은 이틈에 이리저리 빠져나가 남옥저에 이르렀는데, 위군은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대책이 없이 기세가 꺾여 무엇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동부인 유유가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형세가 매우 급박합니다만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으니 청컨대 음식을 들고 가서 위군을 위로케 하옵소서. 그러면 틈을 보아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약 신의 계책이 성공한다면 즉 왕께옵서 공격하시면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왕은 좋다고 하였다. 유유가 위군(의 진영)에 들어가 거짓으로 항복하여 말하기를 ‘제 주군께서는 대국에 죄를 입고, 바닷가까지 도망하여, 자신의 몸을 둘 땅도 없습니다. 장차 진영 앞에서 항복을 청하려 하여 사구에게 죄를 묻고자 합니다. 먼저 소신을 보내어 부족한 음식을 종자들에게라도 바치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위장은 이를 듣고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는 식기 안에 은밀히 칼을 숨겼는데 앞으로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장의 가슴을 찌르고는 더불어 같이 죽었다. 위군은 크게 혼란에 빠지고 왕은 군사를 세 무리로 나누어 기습하니 위군은 혼란스러움에 진형을 갖추지 못하고 드디어 낙랑으로 물러갔다. 왕은 나라를 회복하고 공을 논하여 밀우와 유유를 제1로 삼고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유)옥규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식읍으로 내렸다. 유유는 구사자로 추증하고, 그 아들 다우로 하여금 대사자로 삼았다.


이건 거의 노모의 수준!!!

밀우의 분전에도 상황은 더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군의 추격대는 맹렬히 쫓아왔지요. 결국 동천왕은 남옥저까지 가야했습니다. 남옥저는 고구려가 국내성을 중심의 압록강 중상류를 장악한 후 처음으로 대외진출을 시도한 지역입니다. 이 지역을 손에 넣고 나서 초기 고구려의 국력이 급격히 신장되게 되는데, 이 지역이 매우 풍부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국내성보다 좀 나은 수준이었을 수도 있고요.(뭐든 부족한 강원도라 하더라도 순수 산골인 춘천, 원주의 영서지역보다 바닷가인 강릉, 삼척의 영동지역이 생산력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죠. 신증동국여지승람만 비교해도 영동은 영서에게 ‘우리는 상을 차려도 반찬이 40개’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또 고구려가 일제 강점기 일본은 우스울 정도로 쪽쪽 빨아먹기도 했습니다. 하여간 성장을 해야하는 고구려에게 있어서 옥저는 성장기 영양간식이기도 하고 전국시대 진에게 파촉이 가지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여간 갈 곳은 이제 여기만 남은 상황. 말 그대로 대책이 없는 상황까지 옵니다.


그때 또 하나의 영웅이 나옵니다. 

네, 태평성세에 이런 사람은 찾아 볼 수가 없지요. 

유유라는 자가 나서서 자기가 희생하겠다고 나섭니다. 

거짓 항복을 하고, 그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지휘관을 죽이겠다. 

그러면 혼란이 일어날테니 그때 공격을 해서 저들을 몰아내라는 의견을 냅니다. 

왕이 허락하고 계획은 그대로 진행됩니다. 

그 다음은 저 위의 해석문 그대로입니다.


유유가 행한 계책을 보통 고육지책이라고 합니다. 

스스로를 괴롭게 하여 성공을 거두는 계획이지요. 

다들 삼국지의 유명한 적벽대전 이야기는 아실 겁니다. 

거기서 거짓으로 주유에게 대들었다가 큰 벌을 받은 

원로 장수 황개의 이야기가 있지요. 

화공으로 위의 선단을 궤멸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가깝게 접근해야 하는데 

조조가 미치지 않은 이상 이걸 허락해 줄 리가 없지요. 

설령 송나라 양공도 허락지 않을 짓이니, 

황개는 거짓으로 죄를 입고 그것에 분개해 

조조에게 투항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지요. 

적어도 벌받았다는 말만을 신뢰할 조조가 아니니 정말 죽도록 맞아야 했고, 

그 정보는 여러 경로를 통해 조조에게 전달됩니다. 

그러한 내분에 대한 정보가 취합되니 황개의 말은 실로 둔갑하지요.


사실 고육지책의 원조는 오왕 합려와 오자서, 자객 전제의 합작품이지요. 

그리고 오늘 이야기와도 공통점이 많습니다. 

당시 오나라는 형제 상속이 벌어지는데 한 세대가 다 돌고 나면 

그 아래 항렬의 사촌들끼리 계승할 차인데 그만 부자상속이 일어났습니다. 

당연히 자기가 왕이 될 줄 알았던 합려는 화가 나는 거지요. 

그래서 사촌인 료를 죽이고 왕위를 쟁취하려는데 

어느 왕이라고 암살의 위험을 방치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사람의 장막을 칩니다. 

그 겹겹이 둘러싼 호위병들의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전제는 요리 속에 칼을 숨기고 진상하러 다가갑니다. 

호위병들도 전제의 몸만 수색하고 보내주었을 겁니다. 

그 다음이야 오늘 이야기와 유사하죠. 

물고기 속에 숨긴 칼로 왕을 찌르고 자신도 호위병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스스로를 희생하여 성공을 거두는, 그것이 목숨이던, 다른 것이던. 

뭐, 자신의 퇴로를 만들지 않은 암살자는 성공한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말은 쉬울 뿐, 결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것도, 

또 그것을 보내는 것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떠나는 형가처럼 

“역수는 차구나. 장사는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노래를 

부를 용기가 생기기나 할 것인지요.


동천왕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유유의 작전이 성공하자 

혼란에 빠진 위군을 공격하여 낙랑으로 몰아냅니다. 

진형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말이 

지휘관이 죽임을 당한 후의 위군 추격대의 상황을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이미 국내성을 함락한 위군 본진은 돌아갔고, 

추격대는 와해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패전처리와 열심히 싸워준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겠지요.


식읍과 추증, 그리고 구사자나 대사자의 문제는 넘어가겠는데,

딱 한 문장 하나만 짚고 가지요. 

앞에서 歸死司寇란 문장이 나왔고, 

짐순이는 이걸 '사구에게 죄를 묻고자 합니다'라고 풀었습니다. 

이는 원래 주례周禮에 나오는 말로 歸死於司寇라는 대목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구에게 판결을 맡긴다는 의미지요.

(춘추좌전 양공 3년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위의 장수에게 항복의 의사를 전하는 와중에 

우리나라가 위에게 대들다 이렇게 벌받았으니 모든 것을 수긍하고 항복하겠다. 

그 다음에 위의 정치적 판결에 모든 것을 맡기겠다. 

죽이던지 살리던지 난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항복의 관용구랄까요? 

때로는 항복하는 군주가 소복을 입고 나오던가(이제 죽을 사람이라는 표시)

또는 목에 밧줄을 걸고 나온다던가

(사형장 차리는 것도 번거로우니 스스로 장만하겠다?) 

이런 의미의 수사지요. 

죽을 죄를 사구에게 묻겠다는 말은 이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뭐, 바다건너 일본은 말먹이 노비가 되겠다는 표현을 좋아하더라는 말은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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