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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1. 14:52

원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해석

처음에 득래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왕이 중국을 침범하려고 할 때 수차례 간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한탄하며 말하기를 '이 땅에 장차 쑥갓이 자라는 걸 보겠구나'하고는 끝매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각 군에 명을 내려 그 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무덤가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 처자를 잡았으나 모두 풀어주었다.


오늘의 모자이크도 역시나 크고 아름답구나..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의 비상시국에 두 사람의 다툼이 있었습니다.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김상헌과 현실적인 외교를 주장하던 최명길이 붙었지요. 김상헌이 항목문서를 찢자 최명길은 다시 그걸 붙이며 말합니다. "찢는 것도 충정, 붙이는 것도 충정".


짐순이는 어려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외교, 그 자체가 현실이고, 매우 냉정한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영광이니 명예니 하기보다는 냉정한 현실주의자에 더 쏠립니다. 사실 넘어갈까 하던 이 전쟁의 후일담 하나를 결국 다루는 것은 위대한 고구려, 타오르는 민족혼 따위를 외치기 보다는 거기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빛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고구려를 다룬다고 민족혼 떠들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나라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좀 서글픕니다. 애시당초 중도조차 살아남기 힘든 사유풍토가 되어버려서요.(그 전에서는 이승만이 현대 한국의 사상지형을 아예 불도저로 밀어버린 죄가 크죠. 조봉암 처형 이후 한국은 무뇌로 사는 것이 더 편한 나라가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중국과의 싸움을 막으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물론 결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않았지요. 장기적으로는 잘한 선택이었으나 단기적으로는 살아난 것도 용한 상태입니다. 관구검이 수도를 짓밟았다. 왕이 쫓겨다녔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수도 점령 후 거기에 모여있던 인적자원이 증발해버린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서울집중이 심각하다지만 고대는 수도 자체가 머리요, 심장인 상황입니다. 고려 때까지만해도 지방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하수도 뚜껑을 열고 지옥으로 내려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물론 후대의 교조주의적 행동으로 욕을 먹지만 이 현상을 타개하고 지방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고려말 지방의 성리학자들입니다)


수천명이 사로잡히거나 끌려갔습니다. 이게 그냥 놀이터에서 놀거나 주점에서 한잔 하던 장삼이사면 그나마 타격이 덜한데(물론 신분제사회 기준이죠) 왕도에서 살던 사람은 그 자체가 파워엘리트의 한 축이라는 거죠. 물론 거기에는 왕족이나 대세력가에서 기반한 귀족들도 있고, 또 그들을 보좌하는 인력까지.. 이런 이들이 끌려가거나 죽는다. 국가를 운영할 핵심 노른자위가 파헤치고 잣이겨지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고구려 천만명설이라도 믿고 싶은 분들에게야 '그깟 팔천 또 새끼까면 되는 거지' 하겠지만 문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시대에는 국가의 주축이 1만여가(기록에는 만여명이라지만 그 가족을 포함하면 만여가로 봐도 무방하죠) 정돕니다. 약간 시대가 틀리더라도 과거의 인구증가율이 그렇게 높지 않은데다, 고구려가 위치한 그 지역은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게 불가능한 지역입니다.(물론 고구려 후기 인구 1천만명설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동급으로 봅니다) 델구 가는 입장에서 좀 쓸만하거나 가치가 있거나 타격이 큰 존재들을 데려가지 주인장 냅두고 종만 끌고간다는 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애시당초 관구검의 군사행동의 목적이 고구려에 타격을 주는 건데요.


어쨋거나 이런 결과가 올지도 모른다고 

막으려고 한 사람이 있었다는 건 중요합니다. 

뭐든 강경파가 득세하면 온건파야 가을 바람앞의 낙엽이 되지만요. 

결국 그는 그 파국을 보기 전에 목숨을 끊습니다. 

관구검은 수도를 점령한 후 득래의 무덤을 건드리거나 

그 무덤을 감싸는 나무들도 손대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어차피 살아서 친위파 노릇을 할 것도 아닌데 왜 이랬을까요? 

고구려가 아예 멸망해 지배해야할 지도 모르고, 

또는 앞으로 다른 관계를 설정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를 거스리려는 것을 막으려고 한 

한 인물을 선양함으로써 우리는 정의의 군사라는 것을 과시하기도 하고 

또, 고구려의 여러 세력들 중 

이해관계가 맞는 세력을 포섭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고, 

마지막으로 고구려 공격을 매우 조심스럽게 지켜볼 

여러 세력들에게 전하는 의사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모두 다겠지요. 

관구검은 일개 장수가 아니라 한 지역을 담당하는 지방관이기도 하고, 

위의 대외전략 중 한 축을 담당하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런 정책은 능히 사용해야 하는 입장입니다.


이후의 역사는 득래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저냥 잘 살았는지, 

다시 돌아온 동천왕 일파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을지 알 수가 없지요. 

다만 알 수 있는 건 동천왕의 대중국강경노선에 반대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

아마 삼국사기에 득래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가 아니라 중국기록이  자료가 되었을 것,

그리고 밀우와 유우, 유옥규같은 사람 뿐만 아니라 

득래도 자기가 믿는 방식대로 충성을 다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뭐, 동천왕대의 전쟁은 의외로 많이 다루어지지도 않습니다. 

논문도 거의 없구요. 

그러나 그나마도 대개는 찬란한 국난극복사에 머물러버립니다. 

하지만 전쟁만이 찬란한 것은 아니죠. 

득래같은 자기의 정의를 믿은 사람도 잊혀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말꼬리 ----------------------

그러나 사람들은 강경파를 좋아하고 온건파는 욕을 먹는 건 매한가지인가봅니다. 

다만 고구려때 강경파는 지들도 밥그릇을 지키려고 노력은 한 것과, 

조선시대 강경파는 실재 상황에는 가만히 있다 뭔가 터지고 박살난 후에야 

내가 그럴줄 알았다며 입을 터는 키워들이었다는 점이 좀 다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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