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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6. 18:30

원문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해석

19년(245) 겨울 10월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변을 침공하였다.

22년(248) 봄 2월 신라가 사진을 보내어 화평을 청하였다.


동천왕대 기록을 살피면서 솔직하게 신경을 쓰지 않던 기록들이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 기사들인데 북방의 고구려와 남쪽의 신라가 처음으로 관계를 가지는 대목입니다. 


사실 이 기록을 신뢰하던 사람들은 매우 적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구려는 위와 다투느라 정신이 없던 시절이고 신라 역시 이 시점에 고구려와 국경을 맞댈 정도였느냐, 적어도 충돌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느냐가 문제였거든요. 적어도 고구려가 내려가던가 신라가 올라와야 정상인데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을 박살내기 전이고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으려면 3백년을 더 내려가야 합니다. 


이 기록을 무작정 사기라고 폄하하기 전에 한반도 내륙에서 두 나라가 만날 수 없다면 딱 하나 가능한 곳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동해안입니다. 거대한 태백산맥에 막혀 내륙과는 많이 격절되어 길게 늘어진 동해안 연안지역이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묶이는데 적어도 한반도 내륙보다는 대규모 국가간 충돌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있고, 무엇보다 이 일대를 장악한 토착세력이 강하지 않다는 점에서 노려볼 수 있다는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신뢰하려는 분들도 공통적으로 이 지역에서 두 나라가 만났을 것으로 봅니다. 


이들이 어디서 싸웠느냐. 신라가 함경도로 뻗은 건 아니고, 고구려도 경상도 인근까지 내려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서로가 상대의 본진까지 육박한 것은 아니어서 그 중간 어디에선가 충돌을 했다고 봐야하는데 가장 유력한 곳은 강원도 동해안, 그러니까 지금의 영동지역이 되겠지요. 강릉, 속초, 삼척 어디에선가 충돌을 했다고 봐야합니다. 그렇다면 양 국가가 여기 어디쯤까지 세력을 뻗었다는 것인데 현재 고고학 조사로도 신라가 이 지역을 영유한 건 빨라야 4세기대 그러니까 100년 후의 일이라는 거지요. 문헌적으로는 충분히 상정할 수 있는 거지만 고고학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물론 여기에도 단점은 있어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뭔가가 존재하거든요. 

바로 옥저와 동예이지요. 태조왕대를 전후로 해서 

옥저는 고구려의 영향권으로 들어가지요. 

동예 역시 그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봅니다. 

여기저기 판을 벌이던 한반도 내 한군현들이 서서히 손을 떼고 있거든요. 

처음에 동예지역에 세운 임둔군은 기원전 82년에 폐지되고 

낙랑군의 동부도위부라는 곳으로 재편됩니다. 

한반도에 4군이 세워지지만 

현도군은 중국쪽으로 밀려났다가고구려에게 더 떠밀려나가죠. 

진번군은 낙랑군 남부도위로 바뀝니다. 

처음에 패기롭게 만들지만 본점인 한제국의 상황이 어지러워지고, 

유지비가 소득보다 더 들어가는 상황에서 기원후 30년 아예 동부도위도 폐지되지요. 

이후 직할 군현이 아니라 준자치적인 공간이 되었다가 

왕망의 건국, 광무제의 후한 건국, 어린 황제의 연이은 즉위와 환관과 외척들의 득세, 

삼국동란을 거치며 이 지역은 중국의 손아귀에서 점점 멀어져 갑니다. 

고구려의 동해안 진출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관구검이 고구려를 치기 전, 

요동의 공손씨를 제거할 적에 위는 별도로 군대를 파견하여 

낙랑과 대방군에 대한 지배를 재확보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동예지역에 대한 지배권도 확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낙랑과 대방군은 이 지역을 손아귀에 넣는데, 

적어도 관구검의 침입 시점 직전에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적어도 관구검이 남겨놓은 위군이 퇴각시에 이 지역을 거쳐 낙랑군으로 가거든요. 


자 문제는 이겁니다. 한군현이 다시 확보한 동예가 있는데 

어떻게 신라를 치냐고요. 

물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기록이 문제가 되지요.


正始 6년(A.D.245; 高句麗 東川王 19)에 樂浪太守 劉茂와 帶方太守 弓遵은 [單單大]領 동쪽의 濊가 [고]구려에 복속하자, 군대를 일으켜 정벌하였는데, 不耐侯 등이 고을을 들어 항복하였다.

[正始] 8년(A.D.247; 高句麗 東川王 21)에는 [魏나라의] 조정에 와 조공하므로, 不耐濊王으로 봉하였다. [不耐濊王은]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계절마다 郡에 와서 朝謁하였다. 二郡에 戰役이 있어 租稅를 거둘 일이 있으면, [濊의 백성에게도] 供給케 하고 使役을 시켜 마치 [郡의] 백성처럼 취급하였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예조

- 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중국정서조선전에서 인용합니다.


고구려가 신라를 치는 바로 그 해에 동예지역이 한군현에 복속됩니다. 

그러니까 이 기록이 맞지 않아요. 

아주 빠득빠득 우겨서 시간차가 있다고 치고 

전반기에 고구려가 지배할 적에 이 지역을 거쳐 신라를 치고 

후반기에 한군현이 이 지역을 먹었다. 

이렇게 보아도 되겠지만, 문제는 위 기록에서 보듯 겨울에 침공이 있죠. 

이렇게만 본다면 동천왕의 신라침공은 없었던 일이 됩니다. 

사실 고고학보다 더한 문제가 중국 군현의 존재입니다. 

이 부분을 넘어가고 고구려의 공격을 긍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이건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입니다. 

대충 점거하였다라고 보기엔 어떻게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철군하느냐죠. 

이런 상황일수록 철군과 패배가 동일시되어 공격받기 딱 좋은 상황이니까요. 

(실제 패잔병이나 철수부대는 토착인들의 좋은 목표가 됩니다) 

어느 게 맞느냐, 좀 고민이 되네요. 

사랑이냐 다이아반지냐! 


고구려본기에는 이 사건이 매우 짤막하지만 

신라본기에는 좀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이 기록을 또 개뻥으로 돌려버리기도 어렵습니다. 

신라 상고기 최고의 영웅 우로가 바로 이 사건에 관련이 되어 있어요. 

우로는 이른바 석씨 왕실시대를 연 벌휴이사금의 증손자이자 

그 뒤를 이은 나해이사금의 아들입니다. 

형은 포상8국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이음이고 

우로 역시 신라 최고의 권력자이자 장군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왕이 되지 못하였지만(이른바 어른들의 사정) 그의 아들이 왕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고구려가 신라의 북쪽국경을 공격하였을 때 이를 맞아 싸운 것이 우로였습니다. 


위에서 고민한 한군현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위 기사를 잠시 액면 그대로 고민해봐도 

어떤 것이 이유가 되어 두 나라가 충돌을 벌이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고구려는 관구검의 침입 1년전이었지만 

그 전에 서안평을 공격하였기에 어느 정도 긴장감이 조성되어있던 상탭니다. 

물론 해당 전쟁에서 초반에 동천왕이 위군을 얕잡아본 것처럼 

그런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 전략적 중요도나 경제적 이득 면에서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당분간 위협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나라와 굳이 싸워야 했나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확실한 자료도, 

그리고 그것을 설명할 해석이 틀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글로 쓰긴 어렵습니다. (그래요 미노프스키 입자를 너무 마셔 돌았어여)

아마 지금 더 적어나가면 그 이상은 소설의 영역으로 들어가겠지요. 

다만 그냥 즉흥적이고 여기저기 다 집적거리면 

뭐든 하나 걸린다는 모험주의적 발상이 아닌 이상, 

후대의 미천왕, 고국원왕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을 보자면 

뭔가 치밀한 논리의 흔적이 보이긴 합니다.

(다만 이 자리에선 즉흥적 행동은 아닐거란 쪽에 서있음만 밝히지요)


석우로는 이 싸움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패전 후 잔여 병력을 잘 수습하지만 

매우 미묘한 권력동향의 꼭대기에 서있던 우로는 이 패배를 기점으로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오고 그다지 장렬하다고는 할 수 없는 죽음을 맞이하지요. 

그리고 3년 후 신라가 화해를 청하고 

마침 관구검에게 얻어맞은 몸 추스르기도 바쁜 동천왕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이후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양국의 관계는 조용한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제 동천왕 이야기도 딱 두 편 남았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맘으로 덤볐는데 점점 공부를 하다보니 

베트남에 발을 담군 미국 심정을 이해하게 되네요. 

순간 글을 쓰다가 옥저와 동예 조차 마구 섞어쓰는 것을 발견하고 고치고, 

신라본기 이야기도 해야하고, 

쓰다가 한제국 역사도 다루고, 한군현 관련 연대도 다시 확인해야하고.. 

지금도 이 글을 올릴까 고민중입니다. 

만약 올라간다고 해도 망글이 되거나, 

이수일과 김중배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둘 다 잃고 쓸쓸하게 죽어간 심순애의 코스프레를 보시게 된다는 거.

(손이 두 갠데 왜 둘 다 잡지 못하냐! 탕!!!!!!!!!!!!!!) 

원래 진평왕대를 다뤄볼까 했는데 오늘 글을 쓰다보니 또 석우로가 유혹하네요. 

그런데 이건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거냐!!!


부록으로 위의 낯선 이름들이 어떻게 존재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를 올려봅니다.







Favicon of https://rkawn.tistory.com BlogIcon 에바흐 | 2013.06.26 22:31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영역인데 제가 가지고 있는 고구려사 관련 책을 봐도
이렇다 할 설명이 없군요. -_-;;

그렇다고 석우로라는 걸출한 인물까지 등장하는 기록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고..



그나저나 아래 두 장의 그림은 환빠 격퇴할 때 써먹겠습니다.

미노녀님의 블로그를 출처로 명시할 터이니 환빠들의 공격에 대비하시길.
Favicon of https://rgm-79.tistory.com BlogIcon 제203 마도MS대대 짐순 폰 데그레챠프, RGM-79 | 2013.06.26 22:40 신고 | PERMALINK | EDIT/DEL
오늘 글은 정말 망글인 것이
키보드를 놓고 와서 경춘선을 왕복해야 했고
결국 수원-서울-춘천을 잇는 노선을 왕복.
(오늘의 짐순이는 철이 없는 메텔!!)
그 와중에 지인과 이 문제 이야기하고
이쪽에 대한 박사논문의 일부를 땡기고
중국기록 뒤지고
자꾸 신자료 나올 때마다 논리가 막히고, 또 뚫고나면 막히고
기차안에서 이걸 쓰는 동안 논조가 3번 바뀌는 기록을 세웠군요.
덕분에 왜 이쪽을 연구안하는지 알게되었습죠.
광개토왕비 연구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5초간..
이런 어린 것의 일상에 환빠를 던지는 악행을 하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해봄.
(하지만 나쁜 어른은 저지를지 몰라!)
하지만 망글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로군요.
Favicon of https://comterman.tistory.com BlogIcon 컴터맨 | 2013.06.27 10:55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동천왕! 오랫만에 뵙습니다!
읽다보니 어렴풋이 알듯 모를듯...중간중간 등장하는 지명이나 인명은 귀에 익은데...(차라리 모르면 신경이나 덜 가지!!!)
Favicon of https://rgm-79.tistory.com BlogIcon 제203 마도MS대대 짐순 폰 데그레챠프, RGM-79 | 2013.06.27 14:58 신고 | PERMALINK | EDIT/DEL
제구가 엉망이라 직구던 변화구던 긁히지 않네요.
죄다 폭투! 폭투!
Favicon of https://hrmac.tistory.com BlogIcon 후드래빗 | 2013.06.27 12:16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신라 침공, 신라 화평인데 내용이 상당히 길어서 두번 읽어봤습니다- 역시 동천왕은 헬게이트가.....- 이제 두편 남았군요- 흐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Favicon of https://rgm-79.tistory.com BlogIcon 제203 마도MS대대 짐순 폰 데그레챠프, RGM-79 | 2013.06.27 14:59 신고 | PERMALINK | EDIT/DEL
이번엔 짐순이가 감당하질 못한 부분이어요.
그냥 쉬어가는 부분이라 생각했는데.. 음...
그냥 9번타자에게 쓰리런 맞는 기분..이랄까..
Favicon of https://chunchu.tistory.com BlogIcon 천추 | 2013.06.30 03:20 신고 | PERMALINK | EDIT/DEL | REPLY
역사 공부 잘 하고 갑니다.
좋은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Favicon of https://rgm-79.tistory.com BlogIcon 제203 마도MS대대 짐순 폰 데그레챠프, RGM-79 | 2013.06.30 15:17 신고 | PERMALINK | EDIT/DEL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방문객 | 2014.03.18 17:46 | PERMALINK | EDIT/DEL | REPLY
우연히 들렸는데 몇가지 흥미있는 주제가 있습니다. 위-고구려 전쟁입니다. 몇가지만 물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 고구려군이 동해안을 따라 신라땅으로 들어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기록이 사실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 만일 석우로가 이들을 모두 막았다고 하면 기록이 거짓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3) 왜 신라가 먼저 고구려에 평화사절단을 보냈을까요?
4) 만일 3세기에도 삼국사기처럼 말갈이 존재하였다면 고구려가 위와 싸우는 위기 상황에서 고구려를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당시 말갈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Favicon of https://rgm-79.tistory.com BlogIcon 제203 마도MS대대 짐순 폰 데그레챠프, RGM-79 | 2014.03.19 00:30 신고 | PERMALINK | EDIT/DEL
그냥 물어보는 질문이 아닌데요. 씨익~.

1.
원래 고구려의 첫 진출은 함경도 동해안이었습니다. 어차피 동해안은 좁은 길로 이어진 지형이니만큼 내려가거나 올라갈 수 밖에 없죠. 상대적으로 저항이 약한 곳으로 뻗어나간 것 뿐입니다.

2.
석우로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로선 더 할 말이 없긴 합니다. 신라와 고구려의 동해안을 둘러싼 갈등도 그닥 주목받는 주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고고학쪽의 관심이 더 큰데, 여기도 아직 자료가 해명하기엔 부족해보입니다.

3.
짐순이야 이 당시 신라의 상황을 잘 모르지만 일단은 충돌을 회피하고 픈 마음이 더 컸다고나 할까요? 고구려와 신라의 기본 국력의 차이도 있고, 또 여기저기 경상도 내륙에서 먹고 먹히는 과정이니 힘을 분산시킬 여력이 없다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아직 그쪽은 잘 보지 못하였습니다.
4.
말갈 이야기가 나오면 머리가 아픈 게 사실인데, 일단 강원도 지역 공부하시는 분들의 입장을 대신해서 이야기하자면 말갈은 북방의 그 말갈과 다르며(한규철선생님의 말갈론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강래 선생님의 위말갈론에 가깝달까. 아니면 영산강하류 독자세력권 인식에 가깝달까) 어디에도 부용되지 않은 독자적인 입장으로 봅니다. 다만 이 질문은 잘못된 것이 한반도 내륙의 말갈(주로 영서쪽에 위치했죠)은 관구검의 침입에 관여할 상황이 아닙니다. 그리고 해당지역 사람들에게는 고구려보다 한이 더 편했을 것으로 봅니다. 고구려의 동해안 지역 관리는 가혹했으니까요. 말갈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토착민이란 입장에서 본다면고구려를 편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삼국사기독자 | 2017.10.12 22:4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삼국사기 기록>
*동천왕 19년(245),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동천왕 20년(246),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 위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물러갔다.
*동천왕 21년(247),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대동강유역임)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20년 10월에 전쟁이 끝났는데 단 4개월 만에 신수도를 건설하고 천도할 수 없습니다. 본래 기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삼국지가 맞습니다.

*동천왕 19년, 겨울 10월,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 위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물러갔다. (위군이 신라 땅으로 달아나)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동천왕 20년; (기록이 없음)
*동천왕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1년 4개월 후에 천도한 것이고 동천왕 20년은 본래 기록이 없었습니다. 자치통감의 오류를 받아서 잘못된 것입니다. 관구검 기공비로 의심되는 돌판에도 옥저전투는 동천왕 19년입니다. 3세기 후반 낙동강 유역에서 위나라 군대의 고고학적 유물이 발굴됩니다. 중국을 통일한 서진에 마한과 진한은 사신을 보내는데 변한은 안 보냅니다. 지배층이 위군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낙동강유역이 위군에게 점령되자 일본 구주로 가야인들의 대규모 피난이 일어납니다. 구주에 사람들이 밀려오자 3세기 후반에 구주인들이 기내로 다시 밀려갑니다. 4세기부터 일본의 야요이 시대가 끝나고 고분시대가 시작됩니다.
Favicon of https://rgm-79.tistory.com BlogIcon 제203 마도MS대대 짐순 폰 데그레챠프, RGM-79 | 2017.10.22 23:41 신고 | PERMALINK | EDIT/DEL
초기기록은 또 삼국지나 자치통감'만'을 전재한 것이 아니니 그쪽을 깊게 연구하시는 분의 연구를 고대하죠. 안그래도 천도문제는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는 듯하니까요.
이공온 | 2020.07.08 00:2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예 신라쪽 기록의 연대가 3세기로 소급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더군요. 실제로도 이쪽이 유력하다 생각하는 게, 석우로가 249년 혹은 253년인데 그 아들 흘해 이사금의 즉위년이 310년입니다. 그렇다면 석우로가 죽은 해에 태어났다고 해도 흘해의 나이는 50대 후반일텐데, 정작 신라본기에서는 신하들이 '흘해는 어리지만 나이든 사람의 덕이 있다'면서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되어 있거든요. 고고학적 성과로 봐도 신라의 연대는 끌어올려진 게 보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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