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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다시 동천왕 22년 - 결론을 낼 수 없다는 것이 결론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다시 동천왕 22년 - 결론을 낼 수 없다는 것이 결론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7. 9. 14:00

원문

二十二年 ……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해석

22년 …… 가을 7월 왕이 돌아가셨다. 시원에 묻고 동천왕이라 이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은덕을 생각함에 있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신하들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장되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로 즉위한 왕(중천왕)이 예가 아니라고 금하려 하였다. 장례일에 이르러 능에 이르러 죽는 자가 많았다. 나라 사람들이 섶을 베어 그 시신들을 덮어주었다. 그래서 그 곳의 이름이 시원이 되었다.


맨 첫글의 그림의 재활용! 환경을 생각하는 짐순!

결론을 낼 수 없다는 것이 결론.


이 말도 안되는 말을 꺼내기 위해 꽤 오랫동안 돌고 돌았습니다. 갑자기 위로 올라가 그의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결혼이야기도 해보았고요. 또 관구검과의 치열한 전장으로 뛰어들어도 보았습니다. 작년 10월에 첫 글이 나왔으니 반 년도 더 넘게 스무편 넘게 쓰는 동안 줄곧 생각한 것은  첫글에서 내놓았던 질문을 어떻게 해결할까였습니다. 그동안 공부하지 않았던 고구려 초기사도 공부해보자는 심정으로 달려들었는데 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빙과, 걸스 앤 판처, 일하는 마왕, 포토카노.. 애니 보느라 바빴... 퍽!) 삼국통일기 전후에 비해서 고전을 했습니다. 


산상왕과 동천왕의 시대는 그 뒤를 이을 미천왕과 소수림왕을 거쳐 광개토, 장수왕의 시대의 활발한 활동을 시작케하는 중요한 시댑니다. 아직 주먹구구식의 엉성한 국가였던 고구려가 제대로 나라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시댑니다. 아직 여러 세력들의 느슨한 조합에 가까웠던 형태가 이 시대를 기점으로 서서히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축적된 힘을 바탕으로 668년까지 살아가는 힘을 마련하게 하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느냐를 읊어볼까요? 첫째 여러 세력들을 국가에 소속된 귀족으로 묶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기의 왕은 그저 여러 세력의 공동대표에 머물렀습니다. 대가大加라고 불리던 각 세력의 장은 저마다의 관리조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왕에 직속하지 않는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의 고대국가가 처음부터 중앙집권적인 국가라고 보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이러한 사실로 사실 근거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왕이 맘에 들지 않거나 자기가 위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자신의 소속집단을 이끌고 다른 곳에 귀부합니다. 발기씨가 공손도에게 귀부하는 것처럼요. 이 시대들어서는 거의 줄었지만 그 이전만해도 좀 많은 편이었고 왕도 그걸 막기는 역부족이었어요. 아마 여러 국가들이 나타났지만 결국 고구려, 백제, 신라만 살아남은 것은 이 세 국가만 결속력을 유지하고 차츰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성공한 국가란 말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의 이름 앞에 @#집단의 아무개라고 표기되던 것이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부의 아무개.. 하는 식으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계루부, 소노부, 순노부, 절노부, 관노부의 수도의 5부로

각 세력의 지배자들을 편제하여 관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일국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고구려 국가의 귀족으로 전환시켰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구려 왕도 세력기반과의 단절을 유도하는 대신 

그 지배자들을 귀족으로 포섭하고 그만큼의 댓가를 지불합니다.

권력으로든 재물로든, 또는 명예로 말이죠.

(요건 마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전을 짓고

각지의 귀족들을 불러보은 것과 유사한 정치적 목적을 가집니다..)


처음에는 빈발했을 반항이지만 발기씨의 반항을 끝으로

이제 권력 쟁탈전은 음모나 수도에서의 무력 충돌로 바뀝니다.

발기씨의 반항은 그 여파가 중국에까지 알려져서

발기씨가 마치 새 나라를 세웠다던가, 

산상왕이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웠다던가하는 식으로 보여질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 내부적 충격이 커져서

너무 판을 키우다간 아예 판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지배층 모두의 위기감이 생겼을 지도 모릅니다.

싸워도 적당히 싸우자.

외부에서 손대지 않을 정도로 충돌을 줄이자..

이런 식이었을지도 모르지요.


오니아이는 정말 많은 영감을 주었어요..


그냥 애니 제목 써가며(특히 '오빠지만 사랑만 있다면 관계 없잖아'에게 감사를)

약간 우스개처럼 다루었던 산상왕의 취수혼 조차도

사실 그냥 흔한 에로 동인지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고구려 사회가 변화해가는 흔적을 보여주는 겁니다.

결혼에 의해서 서로가 묶여야할 필요성이 사라지던 시대,

드디어 왕의 권위가 여러 세력들의 그것을 앞질러가기 시작하던 시기.

그러한 결혼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여지기 시작한 그 시점,

그런 복잡한 시대의 변화를 담고 있지요.

그래서 형이 아닌 시동생을 선택하는 왕비 우씨의 선택이

나올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국과의 전쟁도 그전만 해도 국가의 전면전의 느낌은 나질 않았습니다.

태조왕 때 거하게 치루기도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선 변방의 북소리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 시대의 전쟁은 본격적인 전면전이고

무엇보다 중국의 국가전략에 당당히 이름을 거는 수준이 됩니다.

동쪽에 대한 정책을 입안할 때 우선적으로 거론하는 수준이 되었지요.

중국이 군현들을 움직여 고구려를 압박하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


자, 자.. 여기까지 한 말은 고구려사 개설만 봐도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동안의 서술은 노태돈, 여호규, 박노석 선생님의 글 덕분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왜 그들은 순장을 선택했는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 짐순이가 궁금한 건 이거였거든요.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이야기를 궁금해할 때

1차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아무도 모르니 여태까지 답이 안나온거다"입니다.

(사실 이 시대를 다룬 박사논문이나 석사논문도 매우 적습니다..)

지금 짐순이가 가진 궁금증도 그런걸까요?


이런 저런 시대적 격변과 갑자기 툭 튀어나온 동지의식은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저 왕은 착한 왕이었습니다..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뭐, 왕이 절대적인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그냥 왕이 돌아가시니 슬펐다.. 이런 말도 딱 맞는 건 아닙니다.

한국의 고대사를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이 아니라 여러번, 아니 수십 수백번을 겪을 단절이겠지요.

이걸 채워줄 것은 소설의 영역일런지도 모릅니다.

뭔가 근거가 없으면 말하지 못하는 역사학의 속성상

할 수 있는 말이 매우 부족하지요.


이상으로 고구려 동천왕(with 산상왕) 이야기는 마칩니다.

뭔가 허전하지만.. 그건 후일을 기약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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