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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위만衛滿, 한 이방인 군주를 위한 변명 본문
1.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사에서 위만衛滿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일단의 중국인으로 이 땅에 한의 식민지를 건설한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그에 반발로 연에 끌려갔다가 대탈출을 감행한 모세와 같은 인물로, 아니면 남월南越의 조타를 모델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중국에서 조작한 가공의 인물로 그려졌다. 재야학자들에게는 그저 조선제국의 혼란을 틈타 서쪽을 잠식해 나라를 세운 변방의 패역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암묵적으로 그의 조선은 그전의 조선과 따로 보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듯 하다. 여기서는 그의 출신과 그가 조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가 세운 나라의 성격, 그와 동시기에 유사한 왕조를 세웠던 남월의 조타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결론을 대신하여 위만조선이 다음 국가들에 남긴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위만衛滿의 출신과 역사적 배경
기원전 195년 한고조 유방의 절친한 친구이자 개국공신이었던 연왕燕王 노관盧 이 불안한 정세 속에 흉노로 망명하였다. 이때 위만도 그를 따르는 무리 1천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처음에는 무리 1천명으로 시작하였던 위만집단은 곧 전란을 피해 온 연과 제의 유망민을 결집하여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위만을 서북쪽 국경지대에 안착시켜 혹시 있을 지 모르는 한의 공격을 막고자 했던 조선의 준왕準王은 왕위를 잃고 남쪽으로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위만이 한의 공격을 빙자해 왕을 축출했던 것이다.
그의 종족 출신에 대해서는 크게 연의 진개의 침입에 따라 연에 끌려간(혹은 복속된) 조선인이라는 설과 중국인이라는 설이 있었다. 초기 일본학자들은 위만이 중국인이며,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고 중국계 정권을 세웠으며, 이것이 한사군으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두계 이병도는 이러한 일본학자들의 설에 대한 반발로 위만이 원래 조선인이었음을 밝히는 설을 내놓았다. 위만이 연에서 망명한 것 자체로 노관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동으로 도망갔다는 것은 그가 연에서도 동쪽, 요동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이므로 중앙의 노관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또 전국시대 연의 장수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 많은 조선인이 연으로 끌려갔거나 복속되었을 것이므로 위만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연의 혼란을 틈타 조선으로 되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이를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그가 국경을 넘을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과 준왕을 축출하고 왕이 된 후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을 들었다.
그러나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설에는 많은 허점이 있다. 노관의 망명과 위만의 망명이 전혀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사기 열전만 보아도 맞지 않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제후왕의 반란과 같은 사건에 그들의 문객, 가신들이 연좌되어 처벌받고 있다는 증거들이 많다. 개인이 죄를 지어도 가혹한 형벌을 가함과 함께 가까운 친인척, 친구들까지도 연좌되었다. 그 형벌을 면하려면 막대한 벌금을 물거나 흉노같은 외국으로 망명하는 길밖에 없었다. 특히 한초의 유씨가 아닌 제후왕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흉노와 손을 잡거나 제후왕끼리 연대하는 반란이 발발하는 등 국가의 중대한 사건이 많았다. 하필 이 시점에 움직였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가 노관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쪽에 있었다고 중앙과 연결이 없다고 할 근거가 없다. 위만이 노관의 명으로 동쪽에 진주 또는 행정적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었다는 것도 그가 굳이 조선인이 아니라도 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조선 땅에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 또는 그가 이 지역에 잘 적응했다는 사마천식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다루겠지만 토착 조선인과 중국 유망민의 연합정권을 세운 위만이 조선의 국호를 유지한 것은 기존의 이름을 유지시켜 심리적 안정을 주는 정책적 배려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그가 중국인이었다고 한국사의 큰 줄기에 손상을 입는 것처럼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만=조선인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한 해방 직후부터 식민사학극복과 민족의식 확립이라는 숙제를 가지고 있던 초창기 한국역사학계의 학문적 대응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 위만衛滿과 조타 - 한漢이라는 그늘 속에서
위만의 조선에 대해서는 초기 국가성립과 멸망에 대한 부분만이 기록으로 남아있어서 그 국가의 내부구조라거나, 근백년의 정치적 전개, 사회구성, 경제적 기반 등에 대한 자료를 얻는 것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겨우 남아있는 것만을 찾아보면 약간의 것이나마 국가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여러 중층구조로 되어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멸망 당시에 여러명의 상相이 동시에 존재하며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각각 다르며, 역시 상이었던 歷谿卿이 우거와의 마찰 끝에 휘하 2천여호를 거느리고 남한으로 내려갔다는 기사에서 보듯 각각의 상이 자신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특정 지역, 집단의 수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왕이 자신의 관료를 이용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독자세력을 가진 상들과 연합하여 국가를 통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왕도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계 유이민을 기반으로 하는 주도적인 통치집단의 수장이었고, 국가 내부에서는 개인적으로 많은 지분을 소유한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운동력을 가진 상 외에도 친왕적인 대신이 있었다는 것, 상과 다른 기반을 가진 장군(아마 중국계 무력에 기반한)의 존재는 각각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여러 집단들이 어느 정도 느슨하게 연결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28만명을 이끌고 한에 투항한 예군濊君 남녀南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격이 다른 집단도 일정한 지분을 갖고 편제되어 있었을 것이나 그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또 한가지 위만이 한과 교류하면서 수행한 정복과정과 후일 우거의 진국의 교통을 막은 것에 주목할 수 있겠다. 위만은 정권수립 후 바로 요동태수遼東太守와 밀약을 맺어 조선은 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중국의 국경 밖을 안정시키고, 타 종족, 집단이 중국과의 교통을 막지 않는 대가로 병기나 다른 재화를 받기로 하였다. 이를 토대로 조선은 사방 수천리에 이르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인근지역에 자기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한과 위만은 각자 국내기반이 안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 화친하는 노선을 택했다. 한은 동북쪽 변경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데다 그 지역에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위만은 한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한으로부터 많은 물질적 혜택을 얻어 일대의 영도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과 다른 세력간의 중간 통로 구실을 하게 됨에 따라 교역지로서의 혜택도 얻을 수 있었다. 기원전 109년 위만조선과 한의 누적된 갈등이 폭발하게 된 것은 한이 안정된 국정을 기반으로 그간의 대외적인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것과 함께 조선이 이 외신구조를 거부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위만과 유사한 길을 걸었던 예가 남월南越에서도 보인다. 바로 조타(찌에우 다)라는 사람으로 본래는 월남과 인접한 남해군 용천현의 현령이었다. 남해군 위 임효任 가 진나라 말의 혼란을 틈타 자립하려다가 병이 들자 조타를 불러 자립케 하였다. 기원전 207년 조타는 인근 군을 병합하고 남월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무제라고 칭하였다. 남월국은 비록 소수인 중국인 집단이 토착 사회와 밀착된 형태의 연합정권이었다. 지방지배는 왕의 사자가 파견되어 감독은 하였으나 기존 토착사회의 자치적 전통을 존중하였다. 한과는 일찍 화친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세력을 키웠다. 조타는 상투를 틀고 두 다리를 뻗고 중국의 사신을 맞는 등 중국인이었으나 현지인의 관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무리 없이 융화될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한의 외신제를 받아들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자신을 한의 천자와 대등한 남쪽의 천자임을 내세웠다. 후일 한무제 즉위 후의 압박이 거세지고, 중국인과 토착인의 융화분위기가 깨짐에 따라 기원전 111년 한의 침략과 내부 이반으로 멸망한 것까지 위만조선의 예와 유사하다.
(부연설명 : 당시 중국과 이민족 사이의 관계는 상징적인 '외신관계'였다. 각 방향의 이민족 사회 중 친중국적인 유력종족을 대화창구로 인정하고, 또한 영도적 세력이 되거나 그 힘을 유지할 수 있게 한 후 그를 통해 각 이민족 사회를 간접적으로나마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묶어두는 것이 '외신'관계의 핵심이었다. 한대의 동, 서, 남으로의 외정은 이 '외신'관계가 무너진 것에서 기인하며, 중국은 외정 후 외신관계 유지를 위한 거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구체적인 영역을 포함하는 확장이 아니라 중국이 천하의 으뜸이라는 상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였다. 또 외신이 되는 이민족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에 완전히 신하가 된 것이 아닌 명목상의 신하가 되는 것이 자신의 독립을 해치지 않고 대외적인 입지강화와 물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그 체제를 거부감 없이 따를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4. 위만조선衛滿朝鮮과 삼국三國
한국사에서 새로 세워진 국가는 모두 전에 있던 국가의 기반과 경험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었다. 즉,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에서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신라와 고구려의 기반을 흡수해 일어난 것이 고려였고, 고려의 기반을 토대로 세워진 것이 조선이었다. 그러나 고조선과 삼국은 명확히 연결되지 않는다. 고조선 이후 삼국은 초창기의 고조선처럼 '맨주먹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조선과 삼국은 모두 고대에 존재했던 국가라는 데 인정하지만 후대 국가들처럼 이어지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고조선의 역사적 경험은 허공으로 날아간 것일까?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고조선과 그 후 백여년 이내에 세워진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백제국伯濟國), 신라新羅(사로국斯盧國), 부여夫餘 등의 국가들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먼저 고조선 자체의 역사기록과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인 개인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역사적 궤적을 추적하는 것에 한계가 있고, 또 삼국 또한 초기 기록에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만주와 북한지역에 대한 고고학자료의 접근이 용이해 진다면 어떤 연결을 암시, 또는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희망하고 있을 따름이다.
굳이 비유해보자면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족의 침입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 갯벌에, 높은 성벽에 의지해 갸냘프게나마 숨을 쉬던 이탈리아의 암흑기와 약간은 유사하리라 생각된다. 신라의 초기 전승에서 사로육촌斯盧六村은 옛 조선의 유민들이 피난 온 것이라는 증언이 남아있으며, 국호 자체가 높은 성이란 뜻의 고구려는 그 초기 역사 자체가 한군현과의 투쟁의 기록이었다. 기원전 75년 현도군을 만주지역으로 몰아내면서 국가형성의 길을 걷기 시작해 313,4년에 낙랑樂浪·대방帶方을 축출하여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기까지 무려 4백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백제 역시 한군현의 분열정책에 맞서서 때로는 타협하기도, 때로는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계속 삶을 누리고 살았겠지만 고조선에서 이탈했던 준왕, 역계경을 비롯해서,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 한군현이 설치되자 그를 피해서 남쪽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대로 고조선 시대의 경험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 한漢의 문화를 덧붙여서 교역과 외교를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거나 문화를 건네주는 창고의 구실을 했다. 결국 요람은 깨졌지만 그 요람에 대한 기억은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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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1 : 이 글은 역사기행, 고조선 특집편에 기고했던 글이다. (03. 09. 23)
부기 2 : 블로그 정리 시책에 따라 기존에 사용하던 개인블로그의 역사 관련 글을 여기로 옮겨 온 것임을 밝힙니다.
한국사에서 위만衛滿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일단의 중국인으로 이 땅에 한의 식민지를 건설한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그에 반발로 연에 끌려갔다가 대탈출을 감행한 모세와 같은 인물로, 아니면 남월南越의 조타를 모델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중국에서 조작한 가공의 인물로 그려졌다. 재야학자들에게는 그저 조선제국의 혼란을 틈타 서쪽을 잠식해 나라를 세운 변방의 패역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암묵적으로 그의 조선은 그전의 조선과 따로 보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듯 하다. 여기서는 그의 출신과 그가 조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가 세운 나라의 성격, 그와 동시기에 유사한 왕조를 세웠던 남월의 조타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결론을 대신하여 위만조선이 다음 국가들에 남긴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위만衛滿의 출신과 역사적 배경
기원전 195년 한고조 유방의 절친한 친구이자 개국공신이었던 연왕燕王 노관盧 이 불안한 정세 속에 흉노로 망명하였다. 이때 위만도 그를 따르는 무리 1천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처음에는 무리 1천명으로 시작하였던 위만집단은 곧 전란을 피해 온 연과 제의 유망민을 결집하여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위만을 서북쪽 국경지대에 안착시켜 혹시 있을 지 모르는 한의 공격을 막고자 했던 조선의 준왕準王은 왕위를 잃고 남쪽으로 떠나는 신세가 되었다. 위만이 한의 공격을 빙자해 왕을 축출했던 것이다.
그의 종족 출신에 대해서는 크게 연의 진개의 침입에 따라 연에 끌려간(혹은 복속된) 조선인이라는 설과 중국인이라는 설이 있었다. 초기 일본학자들은 위만이 중국인이며,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고 중국계 정권을 세웠으며, 이것이 한사군으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두계 이병도는 이러한 일본학자들의 설에 대한 반발로 위만이 원래 조선인이었음을 밝히는 설을 내놓았다. 위만이 연에서 망명한 것 자체로 노관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동으로 도망갔다는 것은 그가 연에서도 동쪽, 요동지역에 위치하였던 것이므로 중앙의 노관과 상관없는 독자적인 행동으로 보았다. 또 전국시대 연의 장수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 많은 조선인이 연으로 끌려갔거나 복속되었을 것이므로 위만도 조선인이기 때문에 연의 혼란을 틈타 조선으로 되돌아온 것이라고 했다. 이를 결정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 그가 국경을 넘을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었다는 사실과 준왕을 축출하고 왕이 된 후에도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을 들었다.
그러나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설에는 많은 허점이 있다. 노관의 망명과 위만의 망명이 전혀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사기 열전만 보아도 맞지 않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제후왕의 반란과 같은 사건에 그들의 문객, 가신들이 연좌되어 처벌받고 있다는 증거들이 많다. 개인이 죄를 지어도 가혹한 형벌을 가함과 함께 가까운 친인척, 친구들까지도 연좌되었다. 그 형벌을 면하려면 막대한 벌금을 물거나 흉노같은 외국으로 망명하는 길밖에 없었다. 특히 한초의 유씨가 아닌 제후왕들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흉노와 손을 잡거나 제후왕끼리 연대하는 반란이 발발하는 등 국가의 중대한 사건이 많았다. 하필 이 시점에 움직였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가 노관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쪽에 있었다고 중앙과 연결이 없다고 할 근거가 없다. 위만이 노관의 명으로 동쪽에 진주 또는 행정적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위만이 조선으로 들어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의 옷을 입었다는 것도 그가 굳이 조선인이 아니라도 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조선 땅에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는 표현, 또는 그가 이 지역에 잘 적응했다는 사마천식의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다루겠지만 토착 조선인과 중국 유망민의 연합정권을 세운 위만이 조선의 국호를 유지한 것은 기존의 이름을 유지시켜 심리적 안정을 주는 정책적 배려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그가 중국인이었다고 한국사의 큰 줄기에 손상을 입는 것처럼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위만=조선인설이 나오게 된 데에는 일제의 식민사학에 대한 해방 직후부터 식민사학극복과 민족의식 확립이라는 숙제를 가지고 있던 초창기 한국역사학계의 학문적 대응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 위만衛滿과 조타 - 한漢이라는 그늘 속에서
위만의 조선에 대해서는 초기 국가성립과 멸망에 대한 부분만이 기록으로 남아있어서 그 국가의 내부구조라거나, 근백년의 정치적 전개, 사회구성, 경제적 기반 등에 대한 자료를 얻는 것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겨우 남아있는 것만을 찾아보면 약간의 것이나마 국가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여러 중층구조로 되어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멸망 당시에 여러명의 상相이 동시에 존재하며 이들의 정치적 입장이 각각 다르며, 역시 상이었던 歷谿卿이 우거와의 마찰 끝에 휘하 2천여호를 거느리고 남한으로 내려갔다는 기사에서 보듯 각각의 상이 자신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특정 지역, 집단의 수장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왕이 자신의 관료를 이용해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독자세력을 가진 상들과 연합하여 국가를 통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왕도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계 유이민을 기반으로 하는 주도적인 통치집단의 수장이었고, 국가 내부에서는 개인적으로 많은 지분을 소유한 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당한 운동력을 가진 상 외에도 친왕적인 대신이 있었다는 것, 상과 다른 기반을 가진 장군(아마 중국계 무력에 기반한)의 존재는 각각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여러 집단들이 어느 정도 느슨하게 연결된 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28만명을 이끌고 한에 투항한 예군濊君 남녀南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격이 다른 집단도 일정한 지분을 갖고 편제되어 있었을 것이나 그 자세한 사항은 알 수가 없다.
또 한가지 위만이 한과 교류하면서 수행한 정복과정과 후일 우거의 진국의 교통을 막은 것에 주목할 수 있겠다. 위만은 정권수립 후 바로 요동태수遼東太守와 밀약을 맺어 조선은 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중국의 국경 밖을 안정시키고, 타 종족, 집단이 중국과의 교통을 막지 않는 대가로 병기나 다른 재화를 받기로 하였다. 이를 토대로 조선은 사방 수천리에 이르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인근지역에 자기의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한과 위만은 각자 국내기반이 안정되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 화친하는 노선을 택했다. 한은 동북쪽 변경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데다 그 지역에 우호적인 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고, 위만은 한의 지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한으로부터 많은 물질적 혜택을 얻어 일대의 영도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과 다른 세력간의 중간 통로 구실을 하게 됨에 따라 교역지로서의 혜택도 얻을 수 있었다. 기원전 109년 위만조선과 한의 누적된 갈등이 폭발하게 된 것은 한이 안정된 국정을 기반으로 그간의 대외적인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것과 함께 조선이 이 외신구조를 거부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위만과 유사한 길을 걸었던 예가 남월南越에서도 보인다. 바로 조타(찌에우 다)라는 사람으로 본래는 월남과 인접한 남해군 용천현의 현령이었다. 남해군 위 임효任 가 진나라 말의 혼란을 틈타 자립하려다가 병이 들자 조타를 불러 자립케 하였다. 기원전 207년 조타는 인근 군을 병합하고 남월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무제라고 칭하였다. 남월국은 비록 소수인 중국인 집단이 토착 사회와 밀착된 형태의 연합정권이었다. 지방지배는 왕의 사자가 파견되어 감독은 하였으나 기존 토착사회의 자치적 전통을 존중하였다. 한과는 일찍 화친하고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해 세력을 키웠다. 조타는 상투를 틀고 두 다리를 뻗고 중국의 사신을 맞는 등 중국인이었으나 현지인의 관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무리 없이 융화될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한의 외신제를 받아들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자신을 한의 천자와 대등한 남쪽의 천자임을 내세웠다. 후일 한무제 즉위 후의 압박이 거세지고, 중국인과 토착인의 융화분위기가 깨짐에 따라 기원전 111년 한의 침략과 내부 이반으로 멸망한 것까지 위만조선의 예와 유사하다.
(부연설명 : 당시 중국과 이민족 사이의 관계는 상징적인 '외신관계'였다. 각 방향의 이민족 사회 중 친중국적인 유력종족을 대화창구로 인정하고, 또한 영도적 세력이 되거나 그 힘을 유지할 수 있게 한 후 그를 통해 각 이민족 사회를 간접적으로나마 중국의 영향권 아래에 묶어두는 것이 '외신'관계의 핵심이었다. 한대의 동, 서, 남으로의 외정은 이 '외신'관계가 무너진 것에서 기인하며, 중국은 외정 후 외신관계 유지를 위한 거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구체적인 영역을 포함하는 확장이 아니라 중국이 천하의 으뜸이라는 상징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였다. 또 외신이 되는 이민족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에 완전히 신하가 된 것이 아닌 명목상의 신하가 되는 것이 자신의 독립을 해치지 않고 대외적인 입지강화와 물질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그 체제를 거부감 없이 따를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4. 위만조선衛滿朝鮮과 삼국三國
한국사에서 새로 세워진 국가는 모두 전에 있던 국가의 기반과 경험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었다. 즉,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진공에서 국가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신라와 고구려의 기반을 흡수해 일어난 것이 고려였고, 고려의 기반을 토대로 세워진 것이 조선이었다. 그러나 고조선과 삼국은 명확히 연결되지 않는다. 고조선 이후 삼국은 초창기의 고조선처럼 '맨주먹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조선과 삼국은 모두 고대에 존재했던 국가라는 데 인정하지만 후대 국가들처럼 이어지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과연 고조선의 역사적 경험은 허공으로 날아간 것일까?
기원전 108년에 멸망한 고조선과 그 후 백여년 이내에 세워진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백제국伯濟國), 신라新羅(사로국斯盧國), 부여夫餘 등의 국가들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먼저 고조선 자체의 역사기록과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 구체적인 개인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역사적 궤적을 추적하는 것에 한계가 있고, 또 삼국 또한 초기 기록에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만주와 북한지역에 대한 고고학자료의 접근이 용이해 진다면 어떤 연결을 암시, 또는 확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희망하고 있을 따름이다.
굳이 비유해보자면 당시 한반도의 상황은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족의 침입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 갯벌에, 높은 성벽에 의지해 갸냘프게나마 숨을 쉬던 이탈리아의 암흑기와 약간은 유사하리라 생각된다. 신라의 초기 전승에서 사로육촌斯盧六村은 옛 조선의 유민들이 피난 온 것이라는 증언이 남아있으며, 국호 자체가 높은 성이란 뜻의 고구려는 그 초기 역사 자체가 한군현과의 투쟁의 기록이었다. 기원전 75년 현도군을 만주지역으로 몰아내면서 국가형성의 길을 걷기 시작해 313,4년에 낙랑樂浪·대방帶方을 축출하여 한반도 북부를 장악하기까지 무려 4백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백제 역시 한군현의 분열정책에 맞서서 때로는 타협하기도, 때로는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대다수의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계속 삶을 누리고 살았겠지만 고조선에서 이탈했던 준왕, 역계경을 비롯해서,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 한군현이 설치되자 그를 피해서 남쪽으로 떠난 사람들이 있었다.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대로 고조선 시대의 경험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 한漢의 문화를 덧붙여서 교역과 외교를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거나 문화를 건네주는 창고의 구실을 했다. 결국 요람은 깨졌지만 그 요람에 대한 기억은 끈질기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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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1 : 이 글은 역사기행, 고조선 특집편에 기고했던 글이다. (03. 09. 23)
부기 2 : 블로그 정리 시책에 따라 기존에 사용하던 개인블로그의 역사 관련 글을 여기로 옮겨 온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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