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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리와 역사 2. 소백산맥의 빛과 그림자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지리와 역사 2. 소백산맥의 빛과 그림자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10. 10. 15:16

신라사에서 소백산맥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매우 큽니다.

우선 지도를 펴놓고 보면 딱 경상도지역을 빙 둘러 감싸는 형세를 보여주지요.

신라 천년의 역사를 생각해볼 때

이 산맥은 그야말로 요람과 족쇄, 두가지 역할을 모두 수행했습니다.


기원전후로부터 3세기 무렵까지 한반도와 요동지역에는

마치 가루를 부려놓은듯한 모습으로 작은 정치체들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알고 있을 삼한의 소국들이 바로 그런 정치체인 것이죠.

이런 정치체는 그러나 어느 정도 항구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정글과도 같은 약육강식의 혼란 속에서 

탄생과 멸망, 결합과 분열을 반복하였지요.

(혹시라도 그런 소국들 흥망의 모습이 궁금하신분께는

비록 아주 역사적으로 정밀하지도 않은데다 원소스가 야겜이지만

애니 "칭송받는 자"가 도움이 되지 싶습니다. -_-;;) 

일찍부터 성장한 북방의 고구려는 별개로 하더라도, 

한반도 남부에서도 3세기를 전후해서 어느 정도 교통정리가 이루어집니다.

한강유역의 백제, 경주분지의 신라, 

낙동강 하류유역과 경상 서부지역의 가야 소국들이 그렇지요.

이런 마치 태양계 형성과정 중 행성의 탄생과도 같은 작용은

한반도 곳곳에서 벌어지는데

소백산맥은 신라의 성장과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우선 1차적으로 소백산맥은 이 지역의 성장을 저해했습니다.

외부에서 다양하게 벌어지는 기술적 발전을 흡수할 기회를 막았습니다.

자동차와 기차, 비행기등 현대적 교통수단을 이용가능한 

현대인은 지형이 고전적 교통수단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간과합니다.

마치 지금처럼 직선으로 늘어진 도로망이 그때도 있었다고 생각하거나

자연적 교통장벽을 쉽게 오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현대적 '착각'이 가져오는 문제지요.

그러나 한반도 남부의 일부지역은 10년 전에는 교통 오지였고

어느 곳은 지금도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험한 지형에 도로나 철도망을 갖추는 일은 

지금도 어려운 토목공학 공사가 필요하죠.

(물론 돈이 매우 들어가는 건 당연)

그러나 수천년 전 인구 밀도도 그히 낮고

이동량이 극히 적은 상황에

인간의 손길이 입체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과거에

지금과 같은 환경이라고 착각한다면

보리고개와 기근을 이야기하는데 

피자시켜먹으면 되지..라는 아이들이나 다름 없죠.

(아이들이 그러면 귀엽지만 

어른들이 그런 소릴 하면 솔직히 지능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백산맥이 항상 어려움만을 던져준 건 아닙니다.

풍족한 평야의 이점과 문화흡수의 이점과는 거리가 멀지만

(물론 소백산맥 이남의 경상도 지역이 산촌이라는 건 아닙니다.

분지지형에 따른 평지는 있지만 서쪽과 비할바는 아닙니다)

그 풍요로운 지역이 언제나 치열한 경쟁이 평지풍파를 낳았다면

소뱍산맥은 외부에서 오는 충격을 막아주는 

인큐베이터였다는 것을 간과하면 곤란합니다.

백제의 경우처럼 모든 것이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신라와 가야소국도 모든 환경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나 백제가 자리한 지역은 멀리는 중국이라는 초거대 항성,

가까이는 요동군과 낙랑/대방군과 같은 적당히 큰 행성의 중력권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사투를 치뤄야했다면

적어도 그들의 중력이 미치지않은 영역의 이점도 존재했습니다.

그야말로 불리한 환경이지만 치어들도 성어가 될 수 있는 방패막이었다는 거죠.

또한 이런 가혹한 국제 환경에서 이탈한 세력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던 것도 중요했습니다.

적어도 신라의 건국 이전부터 한사군의 설치로 인해 밀려난 세력들이 남하했고

어느 정도 토착세력이 미약한 이 지역이 목적지로 선호된 것 같습니다.

금세기 초에 경춘선 복선화 건설과정에서

현 가평역사 터에서 발견된 달전리 유적은

그동안 학자들이 가설로만 생각해오던 

이런 이동의 중간 경로를 확인한 증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마침 이 문단을 쓰는 지금, 바로 가평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일찍 성장한 고구려와 백제의 4~5세기 대결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광개토왕의 남정이라는 사건이 있지만 그건 정말 의례적인 사건이지요.

아마 천연장벽이 없으면 신라를 비롯한 소국가군들은 

조기에 역사 속에서 지워졌을 것입니다.(이른바 광탈, 조기 퇴갤)


보통 이런 환경에서라면 경쟁에 뒤쳐지기도 합니다.

때론 아놀드 토인비가 말하듯 새로운 도전은 변경에서 시작되기도 합니다.

(아마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서의 문명 발생에서 그랬던 것 같군요)

그게 어던 결과를 낳는 공식이라는 건 없습니다.

어찌보면 결과론적인 추론과정 덕에

공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분과에서 역사학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보기도 하나봅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선 사람들이 시뮬레이션의 0과 1의 덩어리나

실험실의 모르모트가 아닌 이상

먼저 가설을 세우고 거기에 현상을 투영하는 것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쉽게 재단될 수 없으니까요.

왜 여긴 되었는데 저긴 못하였는가..

그것으로도 충분한 고민거리가 됩니다.


말꼬리 -------------------

앞 글은 안산에서 성남가는 길에,

또 이글은 경춘선에서..

이대로 끝나려나 했더니 하나 더 써야겠군요.

다음 글은 가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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