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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귀족제 사회에서의 중앙과 지방..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귀족제 사회에서의 중앙과 지방..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2. 3. 15:55

겐지모노가따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천황인 형의 비가 될 여인을 건드린 히카루 겐지는

그녀 아버지의 분노를 사서 먼 해안가로 알아서 귀양을 갑니다.

(황후가 될 사람인데 다 된 밥에 콧물 투척한 셈이고

또 겐지는 정적 계열에 속했지요)

뭐, 거기 가서도 히카루 겐지로서 할 건 다 하지만 -_-;;

 

거기에 가는 과정이 매우 비장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을 가듯..

네, 실제 상황에 따라서는 그게 마지막일 수도 있었습니다.

겐지는 돌아올 수 있었지만(소설 주인공이잖아요)

많은 이들이 그렇게 가면 잊히거든요.

 

고려 때만 해도 정과정곡 같은 노래가 있고

조선시대만 봐도 농암 이현보의 츤데레 같은 시조도 있고

(어디선가, '짐순인 이 분이 참 맘에 들어요.' 했더니

듣고 계시던 분이 '나, 그 분 후손임'하셔서 놀란 적도 있었군요)

상촌 신흠이나 백사 이항복의 귀양시절 지은 시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고통인가를 미루어 짐작케 합니다.

귀양에도 각 처우에 따른 8가지 구분이 있었는데

아예 방문도 못 열게 하는 것부터 위수지역을 넓게 잡아주는 것까지 다양하였죠.

그런데 이 밖에도 권력에서 밀려나 귀향을 하는 것도 있습니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정도의 차이가 어떠하던

근본적으로 서울에서의 추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는 큰 타격입니다.

 

귀양에 대해선 후일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 넘어가고

자발적 귀향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죠.

사실 귀양제도는 고대에는 없던 제도니 여기서 다루기도 좀 애매합니다.

 

흔히들 고려말 신진사대부들의 약진을 엄청난 사회변화라고 이야기하지요.

단순히 정권 교체가 아니라

진짜 사회 구성체의 틀을 바꾸는 대변혁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지방의 중소지주라는 말이죠.

실제로 지방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기에

지방의 발전에 꽤 관심을 가지던 부류입니다.

그래서 농법이나 의학 보급에 힘을 썼지요.

벼슬을 하러 서울을 올라가더라도,

또는 일가족이 올라가더라도

원래 고향의 생활터전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벼슬 끝나면 귀향도 하고요.

또는 정치적 항의의 표시로 관직을 던지고 은둔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되는 것이 이들은 지역에 뿌리를 내리던 사람입니다.

이런 흐름이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 향약의 시행과

서원의 증가, 학파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지요.

또 원시 유교에서는 군주가 세 번 말해서 안 들어먹으면 때려치우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비록 성리학자라 하여도 공자님 말씀을 핑계로 내려올 수 있습니다.

(실제 공자는 3번 간해서 군주가 말을 안 들으니 은둔을 택한 제자를

형의 딸과 결혼시킵니다.

말년의 공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으로 자로가 수절한 사건도 있지요)

 

그러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귀족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고대의 귀족이라는 것도, 고려의 귀족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지방세력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중앙으로 편제되고

바로 서울 사람이 됩니다.

물론 땅은 여전히 지방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대부와 달리 부재지주의 길을 걷습니다.

말로만 어느 지역 출신이라고 하고

또는 어디를 본관으로 한다고 말로만 떠들지만

평생 그곳이 어떤 곳인지 눈으로 보지 못하였을 확률도 높습니다.

고대와 고려시대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수도권 집중현상을 실현한 사람입니다.

자기 지역이라는 애착도 없고, 가본 적도 없으니

당연히 그곳을 발전시킬 이유도 없습니다.

현대 서울 사람들이 지방을 촌스럽다고 깔보는 것 이상으로

(대구 사는 사람이 서울 사람과 소개팅을 하는데 '부모님 농사 지으시나요?'란 소릴 들었답니다.

매년 봄이면 경춘선에서 신입생들이 시골로 내려간다고 슬퍼하는 소릴 종종 들은

짐순이는 그게 조작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방관에 임명되어 내려가는 것이 아니고서야

기약 없이 내려가는 것은 아예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 시대에는,

 

아직 서울로의 집중이 크지 않던 삼국시대에는

어느 정도 지역에 대한 의식이 남아있던 것이 발견되는데

일정기간이나마 독자적인 묘제나 도구들을 사용하기도 하고

정완진 선생님의 연구에 따르면 원 수도였던 국내성과

새 수도인 평양의 벽화고분에선

복식이나 소재의 차이도 눈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실제 고구려 정치사 연구에서도 두 지역의 차이를 이야기 하기도 하죠.

6세기 후반까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요.

이러한 흐름을 볼 때

귀족제 사회는 중앙과 지방에 대한 극명한 구분이 존재하였고

그 앞 뒤 시대의 상황과는 극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말꼬리 ---------------------

중국의 경우 위진남북조나 수당대에는

중앙귀족이라 하더라도 일정부분 지방에 자기 지분이라는 게 있어서

권력을 놓은 게 문제가 되면 모를까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지는 않은 것 같군요.

귀족제라 해도 각국의 상황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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