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악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본문
원래 고려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관계로
김부식에 대한 이야기만 하던 차에 (뭐, 짐순이는 부식빠니까요!)
그나마 호감가는 인물 중 하나인 이규보의 일화를 옮겨봅니다.
12월에 진강후(晉康候)의 아들인 상국(相國)이 야연(夜宴)을 크게 베풀고 모든 고관(高官)을 불러 모았는데, 공은 홀로 8품(品) 미관(微官)으로 부름을 받고 참석하였다. 밤중에 상국이 공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문장을 잘한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아직 보지는 못했다. 오늘 한번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이인로(李仁老)를 시켜 운(韻)을 부르도록 했는데, 40여 운(韻)에 이르렀다. 촛불을 시제(詩題)로 삼고 이름난 기생에게 먹을 갈도록 하였다. 시가 완성되자 상국은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다음날 상국은 그 시를 가지고 부(府)로 나아가 진강후에게 아뢰고 공을 불러들여 재주를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 진강후가 처음에는 쾌히 승낙하지 않다가 두 번 세 번 여쭌 후에 공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공이 부(府)에 이르자 상국이 진강후에게 여쭈기를,
“이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답니다.”
하고 바로 빠른 자를 시켜 집으로 가서 술을 갖고 오도록 했는데 술이 미처 이르기 전에 진강후는 벌써 술상을 차려 놓고 함께 마시고 있었다. 상국은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취한 다음이라야 시를 짓습니다.”
하고 술잔을 번갈아가면서 취하도록 마시게 한 뒤에 이끌고 진강후 앞으로 나아갔다. 진강후의 앞에 바로 필갑(筆匣)이 있고 붓도 열 자루가 넘었는데, 상국이 친히 그중 좋은 붓을 골라서 공에게 주었다. 이때 마침 뜰에서 오락가락하는 공작(孔雀)이 있기에 진강후가 이 공작을 시제(詩題)로 삼고 금 상국(琴相國)을 시켜 운(韻)을 부르게 했는데 40여 운(韻)에 이르도록 잠시도 붓을 멈추지 않으니 진강후는 감탄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공이 물러나오려 할 때 진강후가 이르기를,
“자네가 만약 벼슬을 희망한다면 뜻대로 이야기하라.”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내가 지금 8품(品)에 있으니 7품만 제수하면 됩니다.”
하자, 상국이 여러 번 공에게 눈짓을 하면서 바로 참관(參官)을 희망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날 상국은 집으로 돌아와 공을 불러 꾸짖기를,
“자네가 벼슬을 희망하는 것이 왜 그렇게 낮으냐? 무슨 이유로 참관을 희망하지 않았느냐?”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나의 뜻이 그럴 뿐입니다.”
했었는데, 12월 반정(頒政) 때에 이르러 7품을 뛰어 사재승(司宰丞)에 제수되었다.
- 동국이상국집, 연보 중에서
술을 워낙 좋아해
한국의 이백이라고 해도 좋을 술에 대한 시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지만
(또 젊은 날의 객기는 태산 아래서 굽어보겠다던 두보와 견줄만합니다)
나중에 먹고사니즘으로 철저하게 무신정권의 나팔수가 되기도 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직 때가 덜 묻은 소싯적엔 이런 깡따구 좋은 짓도 합니다.
이래저래 사회성 부족한 알콜중독자께서 세풍에 시달려 한직을 전전합니다.
나이 46세가 되어도 겨우 8품에 머물러 있는 현시창에
우연히 집권자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그의 재주를 주목합니다.
아버지는 피철퍽한 상황에서 권력을 쥐었지만
아들은 문신들과 교유하여 친분을 닦습니다.
물론 이건 나름 정치적인 계산-세습 영구화를 위한 회유?-이 선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로 가장 득을 본 것은 한량 이규봅니다.
최우는 문신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최충헌에게 이규보를 데리고 갑니다.
술을 먹이고(파워 충전!) 글재주를 선보이는데
최충헌도 관심을 보일 정도가 되어 얼마나 승진시켜 줄까하고 물어보니
7품으로 올려주세염..
이런 대답을 해 최충한과 최우를 벙찌게 합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라 소개한 최우에 대한 엿도 되는 것이거든요.
또는 최충헌이 '이 자식 반항하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유머감각이라곤 탯줄과 함께 던져버린 독재자입니다.
그냥 내쳐버려도 시원찮을 마당에 그런 사람 앞에서
내 생각임..하고 내지르는 객기는
후일의 친정권 나팔수로서의 그의 반생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짜겠어요.
좀, 먹을 게 생기고,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먹고사니즘의 힘은 무서우니 어른들의 사정은 그리도 변하는 것이겠지요.
그냥 생각이 나서 이 일화를 읽자니
홍성원의 소설 "무사와 악사"가 떠오릅니다.
앞에 나서는 무사 뒤에서 조용히 연주하는 악사.
정치라는 틀에서 보자면 이규보의 말년은 부질없기 그지 없는데
이런저런 험난한 세상을 이겨나가자니
악사가 되어야 할 때도 있겠지 싶습니다.
(시성이라 불리는 두보도 지은 시의 팔할이 밥달라는 내용입니다)
요 몇 달, 갑을병정의 세계에서
임, 또는 계의 위치에 서서 이리저리 치이다보니
(눼, 그냥 오락실의 두더집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때리네.. 아놔..
어느 먹튀色姬가 싸놓은 똥치우다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고)
서서히 임계점까지 뭔가 차오른 마당이라
차라리 철로에 뛰어드는 게 속시원하겠다는 생각도 해봤는데
(물론, 아이나랑 결혼할 때까지 살아남을 꺼라는
연방군의 어느 꽃소위보다 더 삶의 의지가 강합니다..)
과거 어르신들의 글을 읽으면
너만 그런 거 아님, 더 우울한 사람 많음.. 이런 가르침을 얻습니다.
말꼬리 -----------------
1. 이러고도 우울증 안걸리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의 강한 멘탈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
괜히 연방의 폭죽 소릴 들어가며 살아남은 게 아니라니까요.
2. 딱, 1년 전에 사기를 읽으라고 권한 악행을 저질렀음에도 이럴 땐 사기 안읽는 게 낫습니다.
3. 공부 좀 해서 다시 돌아오마.. 이런 객기도 부리고 싶은데, 아예 책을 못읽었습니다.
4. 홍성원의 무사와 악사는 읽어볼만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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