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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대도시의 왕궁위치..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고대사 잡설

고대도시의 왕궁위치..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3. 28. 00:45

일단 먼저 전제해두어야 할 것은

고대 동양국가에서의 왕은 세계의 중심축이란 겁니다.

아니 애시당초 인류사회에서 최고 지배자는 

신성성에 기반한 일종의 터부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와이의 추장은 언제나 가마에 타고 이동하고

아무하고나 신체접촉을 하지 않죠.

만약 그가 어디에 발을 디딘 순간 그곳은 왕의 소유가 됩니다.

우연히 발견한 꼬마가 귀엽다고 쓰다듬은 순간

그 아이는 왕의 소유물이 됩니다.

중세 서유럽의 왕들도 종기를 치유하는 권능의 힘을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걸 왕이라 부르던 황제라고 부르던 간에

왕이 단순한 정치적 지배자가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초창기의 왕은 정치적 권한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애니로도 만들어졌고, 국내에서도 많은 팬들을 보유한

오노 후유미의 소설 십이국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었는데

(애니에서였는지 소설에선지 이상하게 다시 찾으니 안보입니다만)

진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요코에게

이웃나라의 연왕이 이런 말을 했지요.

왕은 옥좌에 가만히 앉아있어도 세상은 유지된다는 말을 합니다.

사실 왕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궁금해하던 짐군이에게

정조의 '왕은 천하를 비추는 달빛이다'와 함게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해주었지요.


도시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왕이 머무는 곳의 위치도

그런 면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제도 구축에 원초적 씨앗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주례라는 책이 있습니다.

후대의 각기 다양한 제도들의 원형,

이를테면 네르브 본부 지하 깊숙히 창에 박혀있는 어떤 존재와도 같은 것이죠.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초창기 도시건설에서 이 주례가 제시한 것의 영향은 큽니다.

정방형의 도시형태, 세밀한 도시 내부의 구획

그리고 통치자의 명이 전국 각지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해줄

정연한 도로망의 시발점.

그 세계에서의 왕궁은 정확히 정중앙에 위치합니다.


나라문화재연구소, 平城京, 2010, 78쪽

애석하게도 지금 중국의 도성과 동아시아 도성을 다룬 책이 다른 곳에 있어

하드 속에 있는 자료를 찾다보니 

일본의 후지와라쿄/등원경의 도판이 나왔습니다만

이게 동아시아에서 마지막으로 주례의 형식이 반영된 도성입니다.

(694년부터 710년까지 수도로 쓰여졌습니다)

물론 일본의 지형도 완벽한 정방형 수도를 건설하기 어렵기 때문에

저 도판과 달리 4~5시 방향의 산이 실제 도시를 깎아먹었습니다.

하지만 왕궁 위치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나지요?

물론 조선이나 명청, 메이지 유신전의 한중일에서 

여전히 왕은 의례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또 왕의 일과에서 의례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런 왕의 신성성이 정치력보다 더 중요시 되었던 시대가 

고구려 장안성, 경주 금성, 그리고 등원경이 존재하던 때입니다.


나라문화재연구소, 平城京, 2010, 78쪽


북위의 수도 낙양성과 수의 대흥성/당의 장안성의 시대에 들어서

나라문화재연구소, 平城京, 2010, 74쪽

중국의 수도 건설에서 왕궁의 위치는 크게 바뀌게 됩니다.

바로 궁이 정중앙에서 북쪽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물론 유교가 그 이전부터 뿌리박고 있었지만

이 시대에 들어서 통치자는 남면한다는 사유에 더 충실해진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풀어말하자면 통치자는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하고

신민들은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본다는 것이죠)

사실 제도나 사상도 완전히 물드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냥 백관지/직관지나 당육전같은 책만 보고 제도를 논하면 참 쉽죠..


나라문화재연구소, 平城京, 2010, 55쪽


또 일본의 예입니다만 등원경의 다음에 만들어진

헤이죠쿄/평성경입니다.(710년부터 784년까지의 수도였습니다)

위의 장안성 그림에서 보듯 왕궁이 위로 올라간 형태를 평성경도 취하고 있습니다.

사진 속 빨간 네모가 바로 왕궁의 위치지요.


일본여행을 하며 자료를 모으던 중에 읽은 어느 논문에서(기억이 안나여!)

등원경과 평성경의 왕궁 위치가 다른 것에 대한 이유를 이렇게 풀이하더군요.

등원경이라는 처음 시도하는 수도건설을 할 적에

(그 이전 일본의 왕궁은 왕을 따라 그때그때 지어지는 임시적 성격이 큽니다)

선진국들의 정보를 구하려 햇더니

마침 백제 멸망기에는 백제편을 들고

나당전쟁 직전 외교전에서 신라편을 든지라

당에서 정보를 구할 수 없어 신라에서 구해야 했는데

신라에서도 마침 당과의 관계가 껄끄러운지라

(나당관계는 당현종 즉위전까지 좀 어려웠습니다)

거기서도 옛날 자료를 주어서 옛날 방식으로 도시조영이 이루어졌고

평성경 조영 당시는 마침 관계 개선이 이루어져

당의 최신 자료를 볼 수 있었다고요.

일단 그 이전에 신라와 일본사람들은 수/당 수도 구경 못했냐는 반박이 나올 수 있지만

그냥 본다고 그걸 다 이해하는 건 아니거든요.

(앞에서 말했듯이 뭔가가 완전히 익혀지는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 면도 있고, 나름 재미있게 본 논문이었습니다.


앞서든 정말 표피적인 반박 말고 짐순이가 생각하는 건 조금 다릅니다.

언제나 머리 속의 연구 주제랑 겹치는 문제같아요.

신라가 그렇게 당나라 흉내를 낸 것 같은데

정작 핵에 가까운 부분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요.

표면적으로 참 많은 것을 따오는데요

정작 신라 정치조직을 보면 겉의 제도는 유사한데

실제 작동원리는 여전히 신라 고유의 것입니다.

위에 예를 든 일본이 어떻게든 중국과 유사한 시스템으로 가려고 한 것과는 대조적압니다.

(물론 일본도 일부는 일본만의 고유한 시스템 작동원리를 유지하지만요)

주례보다는 경주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는 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전(소도록), 2003, 25쪽


신라는 각종 도시계획을 중국방식으로 개선해나갔음에도

망하는 그날까지 당나라식의 왕궁위치를 따르지 않았지요.

빨간 네모 안이 왕궁구역.

어찌보면 완전히 자기만의 색깔을 버리지 않는 신라의 속마음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말꼬리 ------------------------------------------

1.

이번 주에 써야할 글이 원래 3편이었습니다.

일본서기의 고구려 기록 문제,

돌궐과 고구려의 전쟁문제

그리고 고대 도시의 왕궁위치 문제.

뭐, 이 블로그를 쭈욱 보셨던 분은 아시겠지만

일단 짐순이는 귀차니스트입니다.

그리고 글쓰는 것도 자료수집과 읽는데 시간을 줍니다.

게으른데 많은 준비를 해야하는 글쓰기를 고집하니

제때 나올리가...


다만 문제는 맨날 발랑까진 척하는 주제에

이런 것도 다 안잊어먹고 애를 먹는 소심한 애라는 거죠. 에휴..


원래 이 문제를 공부하기 위해 경주도 가고

일본도 가고 그러는데 뭔가 정리된 것으로 토해내려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월내 일본행도 5년만 가면 정리가 되겠지 했는데

(이봐... 짐순양, 당신, 거기 가서도 케이온 음반이나 

시스프리&건담 화보집 사는데 열중하지 않았던가..

덴덴타운 옆에 숙소를 정한 것 자체가...)


하여튼 오늘의 글은 임시적인 글이라 잡설에 넣습니다.

그리고 다음주에라도 저 글들은 올라갑니다.

지금도 자료를 뒤지는 중입니다.


2.

짐순이는 도쿠로처럼 박살도 잘내지만 봉합도 잘합니다.

삐삐루 삐루삐루 삐삐루삐~

(흥! 어느 분께 굳이 어지럽지 말라고 쓴 글은 아니어요!)


3.

웃기는 건 본 글보다 말꼬리를 먼저 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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