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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근초고왕 30년, 최초의 역사 기록에 대한 단상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백제이야기

근초고왕 30년, 최초의 역사 기록에 대한 단상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5. 6. 10. 18:09

짐순이가 여기에 글을 쓰는 동안 백제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적게 했지요. 백제에 관심 있는 분들이 안들러주신 것인지 불만접수는 없었습니다. 처음 고대사 공부를 백제사로부터 시작한 것 치곤 그동안 백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적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초기 국가 형성사에서 백제부분은 해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자료가 전해의 이야기를 고물로 만들어버리니, 국가형성사에 약한 짐순이는 더더욱 안보게 됩니다. 그러나 요즘 여기에 글을 남기지 않는 동안 백제 초기사를 읽고 있었습니다.


원문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해석

고기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한 이래 문자로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처음으로 기록함이 있었다/처음으로 "서기"를 썼다. 그러나 고흥이라는 이름이 다른 책에서 보이지 않으므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오래간만에 모자이크를 보니 미노프스키 열핵반응로가 뛰는구나! 쿵닥쿵닥..

역사서의 편찬이라는 것은 한국 고대국가의 발달에 있어서 역사서의 편찬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율령반포라거나 불교의 수용이라거나, 관제정비, 지방지배체제 구축과 같은 사건만큼 조간신문 1면에 대서특필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2면 상단에 올라갈 정도의 지위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서의 편찬은 단순하게 기록을 만들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한국의 고대사에서의 문자 사용은 적어도 초기철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중국과 교역을 하고 정치적 관계를 맺으며, 또는 위만조선의 건국이라는 하나의 전환기를 통해 뭔가 적는 행위는 오랜 역사를 갖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적었나 입니다. 


이를테면 키우는 아이가 처음으로 아빠, 엄마라는 단어, 혹은 자기 이름을 적었다면 그것은 가족 '단위'의 역사에서 매우 큰 사건일 겁니다. 그러나 인류, 혹은 국가, 종족/민족 '단위'의 역사에서 그 아이가 어른이 된 후 독재자를 성토한다거나, 전쟁에 져서 패전국 대표로 항복문서에 조인을 한다거나, 수 만, 수십 만, 수 백만 명의 눈물을 자아낸 문학작품을 쓴 것이 중요하겠죠. 아까 가족 단위의 큰 사건은 그를 기리는 기념관이 만들어질 때 진열장 한 칸을 차지할 수 있겠지요. 갑자기 단위라는 말을 쓴 까닭은 문자의 역사가 아니라 고대 국가의 역사에서 가지는 역사 기록의 가치일 겁니다.


고대국가 형성사에서 역사기록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국가적으로 볼 때, 분권적이던 국가 내부의 힘의 균형이 왕에 더욱 기울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왕실이 여러 세력 중 가장 강력하지만 나머지를 압도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좀 더 강해졌달까요?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하지만(그게 가능한 국가는 없었습니다. 강해보이는 쪽도 일정부분은 양보하는 형국입니다. 하다못해 히틀러의 독제국가처럼 보인 제3제국이나 소비에트 연방도 그랬습니다) 적어도 최대주주로서의 지위는 위협받지 않는 상황의 반영이랄까요. 


그동안은 약간 수평적이던 권력관계가 수직적으로 바뀌어가는 상황입니다. 각각의 신화를 가지고 있던 국내의 여러 세력들이 왕실의 신화 아래로 편입됩니다. 고구려에서도 다들 하늘에서 내려왔음을 표방하던 세력들이 시조에게 귀부하거나 처음 건국과정에서 따라온 조력자로 묘사됩니다. 주몽을 따라 부여를 탈출했다는 오이, 마리, 협부나 도중에 만났다는 재사, 무골, 묵거같은 이들이나 유리왕이 사냥에서 만났다는 날개를 가진 이들, 대무신왕이 부여를 무찌를 때 도와준 부정씨, 북명인 괴유, 적곡인 마로 등의 인물들이 그 예지요. 신라에서도 처음 사로 6촌장은 하늘에서 각각 내려온 사람임을 표방합니다. 이런 독자적 신화를 가진 세력들이 왕실 아래에 놓이면서 각각의 신화가 융합됩니다. 원래 신하였던, 나중에 사랑에 바져서 졸졸 따라 왔던, 지금의 복속관계는 원래 초창기부터 그래왔다고요. 


앞서 온조왕대의 국경기사를 통해, 현재의 정치적 관계를 창세기부터 그래왔음으로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온조왕 13년, 내가 잘난 이유) 그렇다면 왕실만 유리한 것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기 쉽겠지만 또 그 아래로 편제된 이들에게도 이득은 있습니다. 적어도 국가 내부로 들어온 세력들이 이 국가에서 지분을 요구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게 뭔가 이득이 될 수도 있고, 이런저런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밀려날 때 방패가 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선조가 국가 건국에도 기여했고, 이러저러한 국가적 사건에 활약을 했으니 뼈대있는 가문이요. 함부로 밀어낼 생각을 하지 말라는 무기가 되지요. 


모두루묘지명. 출처 - 한국금석문영상정보시스템(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1&Num=10)


집안에 있는 모두루묘 내부에 적힌 묘지명은 이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해줍니다. 모두루는 광개토왕대의 사람인데, 모두루 가문의 시조는 부여에서부터 주몽을 따라 건국에 기여했고, 또 조상 중 하나는 그때까지 고구려가 겪은 최악의 위기인 모용씨의 연의 침공에 활약을 했다고 합니다. 모두루의 가문은 대귀족은 아니었지만 나름 가격家格만은 있는 집안이라는 것을 내세웁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서로에게 굳건한 자료를 제공해준다는 겁니다.(고구려 후기 귀족가문들도 이런 걸 내세우는데 유독 연개소문 가문만 이런 흐름에서 벗어납니다. 적어도 고구려에서의 가문의 역사는 평양천도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이야기겠지요)


이런 기록으로서의 역사 이전에는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누구는 어떤 일을 했고, 또 그래서 누구를 낳고..'이렇게 구전으로 전해지거나 간략하게나마 계보 기록을 취합하여 하나의 역사로 재창조되는 거지요.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 신라의 국사도 그러한 과정의 소산입니다. 일본의 일본서기도 그러한 과정이 상세하게 남아 있지요. 근초고왕 대에 역사서가 쓰여졌다면 그때 처음으로 그걸 한 게 아니라 국가 내부의 재편이 이루어진 후 그 결과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재창조되었다는 뜻이겠지요.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왕릉비의 세대수와 삼국사기의 왕 세대수가 다르고, 백제도 제왕운기같은 기록과 삼국사기가 다릅니다. 금석문이나 중국기록에 적힌 시조가 삼국사기와 다르게 나오기도 합니다. 이는 다양하게 전승되다가 어느 시기에 교통정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적어도 삼국사기는 교통정리 후의 결과로 보입니다. 


문제는 백제입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기록은 그 책의 제목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백제의 역사서의 이름은 확실하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서기 375년인 왕 30년에 근초고왕이 죽었다는 기사에 덧붙여 고기에 이르기를 고흥이 블러블라..한 것입니다. 보통 백제의 역사서라고 알려진 "서기"라는 단어를 고유명사로 보면 책 제목이 될 것이고, 동사로 보면 이때 처음 역사기록을 정리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위의 해석문에서 이 부분을 두 가지로 푼 이유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 서기를 고유명사로 보아 역사서 제목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따지면 동사로 볼 여지가 더욱 큽니다. 어쩌면 김부식이 왕 죽음 기사 말미에 슬며시 덧붙인 것도 이 기사의 불명확성과도 관련 깊을 겁니다. 명사일까요? 동사일까요? 사실 이 문제제기는 짐순이가 처음 하는 건 아닙니다. 원래 짐순이도 명사쪽으로 보고 있었지만 얼마 전에 짐순이의 선생님이 요 문제에 대한 지적을 하신 이후 동사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한참 전에 박대제 선생님이 "의식과 전쟁"에서 3세기 변혁론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을 때만해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요즘에 초기국가에 대한 부분을 공부하는 와중이라 이 이야기를 흘려들을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말꼬리 ------------------------------

1.

선생님이 그랬다고 짐순이가 그걸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짐순이가 반항심이 끝내주게 강하거든요. 애당초 짐순이女ㄴ은 말잘 듣는 애가 아닙니다. 요즘 애를 먹던 주제라 공감도개 매우 컸을뿐. 착한 어린이와 다르다! 착한 어린이와는!!

2. 

지금도 이래서 국가형성사는 건드리기 싫었어..하고 웁니다.

3.

화랑이야기는 조만간 다시 시작할 거예요.(네 女ㄴ말치고 믿을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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