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신라고분은 과연 북방에서 건너온걸까? 본문
연휴를 끝내고 간만에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들어 갔습니다. 원래는 강진의 전라병영성 자료를 구하려던 것인데 간 김에 보도자료도 보자.. 이런 식이었죠. 소식이야 날로 쌓이는데 고대사 관련한 소식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네요. 사실 이 기사는 얼마 전에도 제목만 보고 넘겨버린 겁니다. 사실 제목만 봐도 머리가 아파서요.
신라고분이 북방 알타이계 유목민족들의 무덤과 유사하다는 것은 꽤나 오랜 단골집 사골과도 같습니다. 일본의 역사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이래로 잊을만하면 기어나오는 한민족은 북방에서 기원한 민족이라는 설과도 연결되어 그걸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이용되어왔지요. 호주의 레드야드 교수가 이를 널리 알린 덕분에 외국학자들이 정설로 받아들인적도 있지요. 말꼬리1)
사실 1990년대까지 모든 백제 건국사 논문을 완벽에 가깝게 정리했던 이도학 선생님의 전설적인 논문의 후반부도 에가미나 레드야드의 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그 학설에 찬성하던 안하던 그 논문이 대단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젖먹이라 그 장면을 못본 것이 안타까울뿐) 말꼬리2)
그 때문이라고는 못해도 우리도 그 지역 고고고학 연구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을 비롯 몇개 기관들이 정기적으로 공동발굴을 하고 있지요. 우리도 우리 주변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고, 그쪽에서도 좀 더 발달된 발굴기술과 여러 잡다한 것들을 제공받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실 학자들 사이에 국경이 있는 것이 이상하고요. 과거 제국주의 시절처럼 일방적 약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이상 이런 교류는 매우 좋은 겁니다.
오늘 소개할 기사도 문화재청이 카자흐스탄에서 그곳의 고고학기관과 공동으로 고분발굴을 한 결과보고입니다. 보도자료의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카타르 토베 고분군은 천산산맥(天山山脈)과 인접한 지역으로, 해발 2,300m 고원에 펼쳐진 넓은 초원 중앙에 위치한다. ‘카타르’는 현지어로 1열, 한 줄을 뜻하며 ‘토베’는 언덕을 의미한다. 이 유적은 약 25기의 중대형 무덤과 30여 기의 소형 무덤이 12~13기 씩 한 줄로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올해 조사는 남-북 방향으로 나란하게 조성된 고분군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중형 고분 1기와 소형 고분 1기를 대상으로 진행하였다.
중형 고분은 한 변 길이 25m가량의 정사각형 평면을 띠는 봉분과 묘역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한 석렬(石列)을 갖추고 있다. 매장 시설을 지하에 배치한 구조로, 묘광(墓壙) 안에 나무덧널을 설치하였으며 묘광 위에 통나무 4겹을 중첩되게 놓아 뚜껑으로 사용하였다. 나무덧널 위에는 흙을 두껍게 쌓아 높이 2m가량의 봉분을 만들었으며, 다시 그 위에 냇돌을 2~3겹 깔아 마무리하였다. 유물은 대부분 도굴되어 금제 귀걸이와 구슬, 청동제 팔찌, 토기 등 소량만 출토되었다.
토베고분군 전경. 문화재청 보도자료 중 캡쳐.
참 묘하게 북방의 고분과 신라의 적석목곽분(요즘은 돌무지 덧널무덤이라 합니다)의 형태는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또 유물도 어어 싶을 정도로 닮은 것도 있긴 합니다. 또 유달리 신라고분에서 황금이 나오는데, 일전에 돌아가신 한국고고학계의 원로 김정기 선생님이 황남대총을 두고 (여성 구역에서 나온 황금을 언급하며) '이 사람, 황금에 미쳤다'고 하신 적도 있지요. 황금에 대한 집착도 참 많이 닮았구요.
한참 전에 찍은 황남대총. 이걸 보고 딴지 옛날 대문, @꼬 깊숙히..가 생각나시나여?
그런데 저 위의 자신 속의 고분은 기원전 5세기부터 3세기까지 저 지역에서 번성한 사카문화기의 유적입니다. 다시 말하죠. 기원전 5세기부터 3세기. 신라는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기원전 57년 건국된 나랍니다. 저거랑 닮았다는 천마총이나 황남대총같은 무덤은 기원후 4~5세기의 것이죠. 그동안 기마민족 전래설이 이 나라에서 뿌리박지 못한 결정적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어느 정도 뒷받침 시켜주는 고고학적 발굴이 물밀듯이 나오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정말 기원 전후에 신라를 건국한 근거가 나오는 이 시대에는 더 말할 것이 없죠.
중앙아시아와 신라 중간에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나오면 모를까 문제는 둘 사이의 시간적 간극이 너무 크고, 또 중간에 징검다리같이 나오는 것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고대사에서 마스터베이션 대상을 찾고픈 사람들도 그렇게 내세우지 못하는 게 바로 기마민족 전래설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신라에서 북방민족적 요소가 나온다면 문화요소의 전파, 또는 위진남북조를 전후하여 동북아에 몰아친 유목민족의 홍수 속에서 신라로 뭐든 건너가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한반도로 밀려나던 진출했던 이미 북쪽과 서쪽은 뭔가 토착세력이나 문화도 강하니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동남쪽에 흘러갈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침 철기문화의 전래라는 특이한 전례도 있어서요)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본 유럽인들이 중앙아메리카의 피라미드를 보고 이집트인이 바다를 건너 세운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꽤나 그럴듯한 이야기지요. 그런데 고구려의 장군총도 어떤가요? 정말 어떤 이는 이집트와 중앙아메리카 카의 피라미드 역시 위대한 한민족이 세계를 지배한 증거라고 떠든 적도 있지요. 말꼬리3)
사진 출처는 한국일보 기사
이런 문제로 고고학계, 인류학계는 꽤나 오래전에 해답을 내놓았습니다. 아이디어의 공유. 꼭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어느 정도 비슷한 사유구조를 가진 인간은 전혀 다른 곳에서 유사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죠. 꿋꿋하게 과거의 유산을 실제 사용하지는 않고 기억 속에 보존한 상태로 떠돌던 북방민족이 낯선 땅에서 수백년 전의 문화유산을 되살려낸다는 것보다는 이게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굳이 방패질을 해보자면(문화재청장님이 보시고 이 어리고 병약한 것, 밥먹고 살 수 있게 해주시면. 굽신굽신..) 저 기사를 주목받기 위해 좀 장난친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정말 저것이 동북아의 문화교류 수준을 떠나 우리 민족문화의 원류라고 믿는 연구자가 있다고 생각하기 싫거든요.
말꼬리 ----------------------------
1)
조선왕조실록 CD가 나오기 전엔 한국사를 연구하는 외국 학자들이 한국어를 익히는 것은 필수가 아니었습니다. 먼 과거로 올라갈 수록 일본어만 습득하여 일본 논문으로 공부하는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60년대 한국에 유학와서 한국사를 공부한 하와이대 슐츠 교수같은 분이 오히려 이상한 경우였지요.(이 할배, 한국말로 농담 잘하시데요. 캬캬캬) 국력약한 나라의 비운이랄까.. .
2)
백제의 기원과 국가형성에 대한 재검토, 한국고대사연구회 편, 한국고대국가의 형성, 민음사(대우학술총서), 1990.
3)
이게 뭐냐 비슷하냐는 분들께, 실제 이집트 남쪽의 에티오피아 쪽 피라미드는 이거랑 비슷합니다. 직사각형으로 솟은 건물을 세우기 전의 인류가 높은 건물을 세우는 방법은 아래에서 위로 갈 수록 좁아지는 건물 뿐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만이 피라미드가 아니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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