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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김부식은 실제로 정지상을 질투하였을까?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김부식은 실제로 정지상을 질투하였을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5. 2. 10:59

시중 김부식과 학사 정지상은 문장으로 함께 한때 이름이 났는데,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속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상이,


임궁에서 범어를 파하니 / 琳宮梵語罷

하늘 빛이 유리처럼 깨끗하이 / 天色凈琉璃


라는 시구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부식이 그 시를 좋아한 끝에 그를 구하여 자기 시로 삼으려 하자, 지상은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뒤에 지상은 부식에게 피살되어 음귀가 되었다. 부식이 어느 날 봄을 두고 시를 짓기를,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柳色千絲綠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 桃花萬點紅


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일천 실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는냐? 왜,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柳色絲絲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 桃花點點紅

라고 하지 않는가?”


하매, 부식은 마음속으로 매우 그를 미워하였다. 뒤에 부식이 어느 절에 가서 측간에 올라 앉았더니, 정지상의 귀신이 뒤쫓아 와서 음낭을 쥐고 묻기를,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왜 낯이 붉은가?”

하자, 부식은 서서히 대답하기를,


“언덕에 있는 단풍이 낯에 비쳐 붉다.”

하니, 정지상의 귀신은 음낭을 더욱 죄며,


“이놈의 가죽주머니는 왜 이리 무르냐?”

하자, 부식은,


“네 아비 음낭은 무쇠였더냐?”

하고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정지상의 귀신이 더욱 힘차게 음낭을 죄므로 부식은 결국 측간에서 죽었다 한다.


- 이규보, 「백운소설」, 『동국이상국집』중에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을 다룰 때

많은 사람들에게 김부식은 그저 악인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단재 신채호임은 유명한 사실입니다.


정지상과 관련한 이야기에서도 김부식은 악인으로 묘사됩니다.

중국문물에 찌들어 고유의 사상을 억압한 것으로 모자라

젊은 천재의 재기마저 질투해 죽이고 마는 악당 중의 악당이죠.

어떤 분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짜르트를 질투하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의 살리에리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으며 질투설은 근거가 없다고 합니다)


실제는 어떠하였을까?

과연 김부식은 정지상의 재능을 질투해서 죽인 것일까?


그의 죽음에 문학적 충돌이 있었다는 것은 많은 이야기를 낳았는데

특히나 김부식은 고문의 대가였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정지상은 좀 더 자유로운 문학관을 가졌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의 싸움이 정말 재능에 대한 질투와 문학관의 차이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현대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그당시 문학/예술과 정치는 하나일 수 없다는 겁니다.

현대에는 일부 경향문학이라는 게 존재하지만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에 비해

그 당시는 자신의 정치관을 표출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문사철이라고 해서 그저 인문학 중시라고 보는데

철학이 가징 기본에 있으며, 역사는 그 행동의 근거를 제공하고

문학은 그 의식을 표출하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문학에 예술성이 적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융합이라고 해두죠)

과거도 그저 글짓기로 관리를 뽑는 게 아니라

이 인간의 공부의 깊이와 정치관이 어떠한가를 살피는 고난이도의 논술시험인 겁니다.

(실제로 서울에서 치루는 최종시험-고려의 예부시, 조선의 전시-의 경우 

한가지 주제를 주고 그에 대해 논설문을 씁니다)


그러니까 이 둘이 충돌하였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정치여야 합니다.

둘은 작가로써 싸운 것이 아니라 정치가로 싸웠습니다.

그 점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저 이야기가 지닌 행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글로 미루죠.
(묘청의 난을 다루기에 앞서 김부식의 동생인 김부철의 상소문을 이야기해야지 싶습니다.
두어달 전부터 밀린 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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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꼬리 :
마침 돌아다니다보니 저랑 같은 주제로 쓴 글을 발견했습니다.
역사에 대한 좋은 글을 써주시는 초록불님이신데
이 분도 이걸 썼으리라 생각을 못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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