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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원문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歧作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 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 裹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 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羣臣立延優爲王 해석(연)우는 의관을 바로하고 (왕후를) 문에서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하기를 “대왕은 죽고 자식은 없는데, 발기는 연장자로 당연히 왕위를 이어야 하는데 첩에게 이르기를 ‘다른 마음을 먹었다’고 합니다. 난폭하고 무례하니 그래서 도련님을 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연우가 예를 더하여 친히 칼을 칼을 잡고 고기를 썰었다. 실수로 그 손가락에 상처가 나니, 왕후는 치마의 띠를 풀어 그 상처가 난 손가락을 싸매주었다. 장차 (왕후가) 돌아가려 할 때, 연우..
http://gyeongju.museum.go.kr/html/kr/exhibitions/exhibitions_020201.html?idx=124&mod=view 일시 : 2012년 9월 18일 ~ 11월 18일 장소 : 국립경주박물관 기획전시실 나름 최치원에 대해 우호적인 블로거로서(사실은 츤츤거리기도 합니다만)이 전시를 두고 넘어갈 수는 없군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최치원에 대한 특별전이 진행중에 있습니다.이 전시야 경주에 가보지 않는한 볼 수가 없는데일요일에 마야전 본다고 중박갔다가 도록을 판매하는 걸 들여다보니그가 지은 책이나 그가 기록된 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 같군요. 처음엔 이게 뭔가하고 생각했지만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문자의 인간이었고, 그의 유품이랄 것이 남아있지 않는한책이 중심이 되는 전..
사실 한국의 출판시장은 그닥 좋지 않습니다.출판단지가 있는 파주에선 책이 안팔리면 그냥 창고에서 물을 뿌려 폐지로 팔기도 한답니다.창고유지비용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까요.결국 서점에서 잘 팔리는 건 자기계발서뿐이죠.그러나 그것마저도 욕할 수 없습니다.뭐 맘이 편하고 여유가 있어야 책을 읽죠.저야 책을 읽는 것이 직업이라면 직업이라 1년에 몇 백에서 천단위로 쓰지만저를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책을 안본다고 뭐라 할 수는 없는 겁니다.가끔 만화책은 사서보라고 욕하는 분들이 있는데(근데 저 사서 봐요. 다운도 받지만. 냥타입 오늘 두 권 산 미친 짓도 했음)왜그런지 주변의 그런 인물치고 지 전공책 사는 놈은 못본게 일부인지 다 그런지.. 특히나 엉망인 분야가 번역에 있지요.얼마전까지는 연구업적에 번역은 안들..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기왕(岐王)의 집에서 항상 그대를 보았고 최구(崔九)의 정원에서 노랫소리 몇 번을 들었던가 지금 이 강남은 한창 좋은 풍경인데 꽃 떨어지는 시절에 다시 그대를 만났구려 ---------------------- 기왕 : 당예종의 넷째 아들로 현종의 동생이기도 한 이범 최구 : 최척. 구는 최씨집안의 항렬에서 아홉째라는 뜻. (번역은 김원중 역, "당시감상대관", 까치, 1992, 37쪽에서 따옴) 두보가 젊었을 시절에 기왕과 최구의 집에서 만나던 이구년을 강남에서 만났다. 한 명은 필명을 날리던 문사였고, 한 명은 노래 하나로 알아주는 가수였다. 안록산의 난을 맞이하여 이리저리 헤메고 다니다 강남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아, 풍경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데 우리들의 신세는 화..
고대사에 대한 기록 중에는 고흥이라던가 이문진, 또는 김대문이라는 이름은 전해지지만 그들의 저작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필자는 화랑세기를 인정하지 않는 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최소 김부식은 여러 종류의 사서를 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중에서 중국사료들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김부식이 국내사료를 인멸하지 않았음은 다음 글을 살펴주세요 → http://rgm-79.tistory.com/8) 그래서 김부식이 서술한 삼국사기가 어떤 사서인지 비교할 대상이 없기에 각자의 마음 속에서 그리는 심국사기의 이미지가 너풀너풀 날아다니는 중이죠. 문제는 삼국사기 안읽고 하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진실처럼 포장된 상태로요. 그런데 삼국사기 안에는 약간의 흔적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김부식은 유달리 최치..
삼국사기에 인용된 자료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은 확실한 인용이 있는 것만 추려보니 총 65건 이상이 발견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국내기록을 추려보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1. 들어가며 삼국사기는 한국고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문헌기록입니다. 동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김부식은 자료수집의 과정을 거쳐 전시대에 기록된 문헌자료를 수집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또 내부의 기록 속에 인용한 자료의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 인용서적은 중국의 사서오경부터 일본의 기록까지, 시문집으로부터 불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이 글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어떤 방법으로 쓰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입장에서 국내자료, 특히 고려시대의 저술과 문집을 어떻게 이용하였는가를 찾아내보려고 합니다. 과연 김부식은 어떤 자료를 보았는가를 넘어서, 동시대인들이 편찬했을 다른 자료들을 어떻게 취급했는가에 관심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지요. 2. 삼국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