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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일본 율령지배의 한 흔적..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자료로 보는 고대사

일본 율령지배의 한 흔적..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6. 11. 00:32


출처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도록 『문자, 그 이후』(2011) 39쪽


위의 목판은 가가군(이시카와현 가호쿠군 스바타쵸)에서 관할 마을에 내려보낸 명령서입니다.

현재 이시카와현은 옛 가가국과 노토국이 합쳐졌는데

(레이디 가가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이 목판은 가가국지역에서 발견된 겁니다.


이시카와현, 스타바쵸는 가나자와시 위쪽에 있습니다(출처는 구글신의 계시에 따라)


율령제하면 잘짜여진 국가의 통치체제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앙정치제도라던가 지방행정구역, 군사제도와 같은 행정기구만을 떠올리기 쉽죠.

그러나 실상은 황제의 지배를 백성 하나하나 빠짐없이 전달하는 것입니다.

관리들만 잔뜩 모아둔다 한들 그것만으로야 비누하렘에 불과하지요.

(이조판서, 등짝을 보여주시오. 즈~은하, 승은~이 망극하여이다~~~~.. -_-;;;)


통일신라를 다루는 수업을 할 때마다

지금의 북한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5호담당제니, 거주와 이동의 제한, 직업이나 생산, 생활전반에 대한 국가통제,

통치자를 중심으로 한 극소수의 지배층 독점, 왕경과 지방의 존재론적 차별 등등..

현재 대한민국, 아니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치를 떨 일들이

율령사회에서는 마치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물론 율령국가나 북한사회를 단순비교하자는 건 아닙니다)

중국 고대의 제민지배체제가 체계적으로 완성된 모습이랄까요.


위 목판은 율령국가의 지배시스템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둔황지역의 호적, 균전제문서와 신라촌락무서와 함께 중요성을 가지지요)

상세한 내용은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출처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도록 『문자, 그 이후』(2011) 38쪽


술까지 마시지 말라뇨..하고 화를 내실 주당들도 계시겠으나

문제는 이것이 어디까지 강제되었는가에 대해선

당육전이나 일본의 여러 율령에서 보여지는 것과 다르게 돌아갑니다.

중국만해도 그 율령제어가 항시 유지되지도 못했고

일본은 아주 중국을 카피하겠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기본구조가 듕궉과 달라 뜻이 잘 통하지 않습니다.

(신라는 딱 중간정도에서 유지합니다)

율령을 강제한 자 스스로 비 율령적인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고

평성경시절에 전국의 농토를 100만 정보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게 달성된 건 메이지유신땝니다.


생각해보면 그 노력과 그에 대한 반동이 중세사회를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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