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새로운 역사학, SNS역사학의 미래? 본문
1.
1964년 부천의 한 신앙촌을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의 김원룡선생과
조유전(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장), 지건길(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의
당시는 학부생이지만 지금 이름만 대면 알만한 어르신들로 구성된 조사팀이 조사하였다.
이 신앙촌에서 나온 쓰레기를 조사하여 분석하고,
신앙촌 거주민의 실생활을 살펴 유물의 출토 현상과 비교해보는 실험이었던 것이다.
당시 김원룡선생은 신고고학(과정고고학)이라는 새로운 고고학의 조류와 싸우는 듯한 상황이었다.
고고학 유물을 통해 인간 행위의 패턴을 해석하고
더 나아가 그 행동의 근원이 되는 사유의 형태를 밝혀나간다는 신고고학의 방식에
김원룡선생은 이 실험적인 발굴을 통해 의의를 제기하였다.
덕분에 이양반은 구미학계에서 그야말로 구고고학을 고수하는 수구꼴통으로 낙인찍히기도 하셨지만..
이런 쓰레기장도 역사가에겐 보물일 수 있다. 출처는 http://blog.ohmynews.com/savenature/127595
쓰레기장에서 나온 그대로만 본다면 1964년 한국인의 주식은 라면이었다.
물론 당시의 식량생산이 충분치 않아 1950년대 후반까지는 미국의 식량원조에 크게 기대고 있었고
80년대까지 라면으로 끼니를 떼우는 집이 많긴 했다.
임춘애가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동정이 아니라 공감이었기 때문임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저 위의 결과만을 볼 때,
유물이 드러난 이러한 결과와 실제 사람들의 생활상은 같은 것도 있지만
역사적 맥락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오판할 것이 많았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발굴된 유물은 그야말로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고고학에 있어서의 문화복원에는 큰 제한이 있고, 현명스럽고 기발한 해석이나 추측은 엉뚱한 오해이거나 착오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결론으로 이끌어졌다.
- 김원룡, 「나의 한국 고대문화 연구 편력」, 『한국사시민강좌』1, 일조각, 1988, 127쪽에서..
2.
만약 전국의 역사학연구자들의 집이 전부 소멸되고 모 연방의 폭죽의 집만이 살아남아
2700년대 고고학자의 손에 발굴되었다고 치자.
종이가 많지만 우연히 삭거나 불에 타지 않고 잘 보존되었다고 가정한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우선은 역사책이 많은 것으로 보아 역사학에 관련되었거나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판단을 먼저 내릴 것이다.
그리고 회사 명함이라던가 졸업장도 썩지 않고 남아있다면,
'오! 『야근병동의 역사』, 『이토 슈샤쿠 평전』, 『동급생과 애자매의 애정관 비교』를 쓰신
위대한 역사가 RGM-79선생의 집이 발견되었다'라고 환호성을 지를지 모른다.
(마치 이름만 남았던 『고사기』, 『일본서기』의 저자 오노 야스마로의 무덤이 발견되었을 때처럼.
그리고 누가 1억 주면 저 책들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책들을 분석하다보면 좀 머리가 아플지도 모른다. 분명히 역사학 연구자같은데,
한국고대사에 치우치긴 했는데, 건담책과 『메가미 디럭스』, 『냥타입』에 피규어 몇 개도 나와.
아놔, 『세라복과 중전차』도 요기 있넹.. 이 자식 대체 뭐하는 작자야..
이것말고 클라나드의 토모요도 있습니다.;;;;
2000년대 과학기술사를 보면 분명히 개나소나 스마트폰을 쓰던 시대라는데 그와 관련된 유물은 하나도 안나와.
어떤 고고학자는 이것을 기록의 잘못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유적 조사를 통해 2012년에 스마트폰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2012년에 19세였다는 RGM-79에 대한 기록이 틀리다던가
아마 1980년대에 활동한 인간, 또는 스마트폰을 전부 불태웠다는
2030년대 독재자 장떡팔의 시대의 유적이고 RGM-79의 열렬한 숭배자인
이 사람은 또한 2010년대 물건 수집광이었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떡팔아, 미안 널 2030년의 독재자로 만들었구나 -_-;;;)
이건 우스개 소리가 아니다.
만약 모든 물건의 연대가 지워져있고,
또 2700년대의 고고학자들에게 21세기 전반의 자료가 전혀 없어 아는 것이 이것 뿐이어서
연대를 특정할 수 없다면 이런 결론을 충분히 내릴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고고학자들을 디스하기 위한 글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료만을 가지고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그들의 연구가
인디애너 존스의 고고학을 가장한 약탈고고학처럼 장난이 아니라는 쉴드일뿐이다.
3.
며칠전에 후드래빗님의 글을 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글이 역사학의 자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날 오후 지인과 차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아니오'란 대답이 돌아왔다.
워낙 많은 글이 올라오니까 트위터는 일정기간마다 글을 지운다는 것이다.
하기는 억단위를 넘는 사람들이 종일 화면만 들여다보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그것이 오래 남아있을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은 누군가는 그것을 보관한다는 곳이다.
다시 말해 캡쳐를 뜨기도 한다.
이번 의지로 충만한 사건에서도 그 문제가 된 글은 지워졌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캡쳐하여 증거/사료의 소멸을 막고, 그야말로 공유를 해버렸다.
그녀들이 아닌 척하기엔 너무 나가버린 것이다.
지금이야 홈페이지에 의해 많이 죽어버린 개인 홈페이지때도 처음엔 사용자가 지우면 더이상은 볼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분기별로 그 내용을 저장해서 보관하는 아카이브가 생겼다.
이제는 하드 속에 최종수정본 화일만 저장해둔 네띠앙이나,
천랸, 신비로 시절의 홈페이지를 가끔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러한 수많은 수다들도 저장할 수 있고, 나중에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요즘 IT계의 화두로 떠오른 빅데이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에 국한 되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에게 개인의 하드디스크나 서버도 쓰레기터와 패총, 무덤같은 보물의 저장소가 될 수 있다.
4.
이 글을 쓰기 위해 어느 연방의 폭죽은 단 한 줄 쓰겠다고 책 한권을 사고,
그것을 사러 갔다가 다른 책 5만원 어치를 지르고,
서울에 있다가 춘천집에 놓아둔 책에서 인용문 하나 넣겠다고 경춘선을 왕복하는 만행을 저질렀음.
이 더위에 낭비성전투도 아니고.. 참..
나중에 가면 현재 우리가 하는 것들도 이렇게 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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