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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강릉 강문동 신라토성 발굴 현장설명회 다녀왔습니다..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자료로 보는 고대사

강릉 강문동 신라토성 발굴 현장설명회 다녀왔습니다..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8. 3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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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처음부터 말하자면 그리 말할 게 없었습니다. 진짜루~.

동서울에서 10시 48분 차를 타고 가서 여유가 있겠거니 했는데

마침 태풍이 오고 있었죠.

그래서 10분 전에야 강릉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고

겨우 시간에 턱걸이하듯 발굴현장에 도착했는데

설명회는 어디서 하는지 설명이 없어 택시를 타고 몇 바퀴 돌았습니다.

겨우겨우 연락이 되어 현장에 찾았는데 이번엔 택시가 자긴 카드 안되는 거라구 해서

(물론 카드사용 표시를 보고 탔죠. 안붙은 건 한 대 보내고 탄 겁니다..)

편의점에서 돈 찾아 와서 내고 올라가니 PPT설명은 끝나 있었습니다.

원래 이 바닥이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 많은지라 보통 5분정도는 알아서들 늦춰 시작하는데 말이죠.

설명회장엔 들어가지 못하고 설명회장 입구에 늘어놓은 유물들만 봤습니다.

한때 많이 만지던 시대 유물이긴 한데

이제와선 고고학강의도 어렵다고 느낄만큼 고고학과 멀어진지라

다른 분들처럼 만져보고 들어올려 이것저것 확인할 것도 없었구요.

뭐, 토기 제작에 들어가는 접합흔이나 손가락 자국같은 것,

이 바닥에서 말하는 구연부(속된말로 주둥이, 갱상도에선 주디)를 완성할 때 어떻게 하나..

이런 사항들이 있지만 여기 온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자다가도 암송할 정돈로 많이 만진 분들이니

굳이 그 정도까진 안하죠.(어차피 보고서 쓸 사람들이 다 할 것인데요)

대략의 특성만 한 번 훓으면 됩니다.

딴 건 모르겠고, 그저 완이라 불리는 그릇보고 정말 5~6세기 것이란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래도 얘는 매트릭스 사진으로 안찍히네요.. 


금방 들어왔는데 현장보자고 얼른 나가자네요.

사실 여기 온 목적도 저 유물보다는 성벽이었는데 대다수 분들도 그렇더군요.

저 유물들이야 강릉 일대에선 많이 나오는 겁니다.

신라가 4~5세기대에 이곳으로 진출하며 일찌감치 신라계 고분들이 많이 만들어지거든요.

그러나 신라계 토성이 워낙 희귀한 것이라 강원도 내의 고고학자들이나

언론에서 많이들 모여 들었습니다.

태풍이 지나는 경로상에 위치한데다 아침부터 폭우가 쏟아진 터라 

사실 많이 몰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독도문제가 커질대로 커진지라 오히려 기자들이 더 많은 설명회가 되었습니다.


설명회야 선배나 후배 꼬셔서 자료구하면 되는거구

현장이나 볼 수 이으면 그것만으로도 이득이라는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날씨였죠.

평소 화창한 날시에 개최하는 현장설명회라면 유적 내 모든 조사영역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을텐데

그냥 비도 아니고 태풍이 오는지라 방수천으로 다 봉하고 일부만 보여주는 현장설명이라 많이 아쉬웠습니다.

적어도 성벽을 어떻게 쌓았는가, 어떤 흙을 어떤 공법으로 쌓았는가(물론 설명해줘도 잘 모릅니다)

이런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흔치않는 기횐데 앞의 설명을 듣지 못한데다

비도 오고 정신 없이 오가는 와중에 자세히 볼 수 없었다는 건 아쉽습니다.

더욱이 바로 흙을 덮는다는 사실이 그 아쉬움을 더하지요.

오늘처럼 맑은 날이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이 글도 약간은 풍성해지겠지요.


성벽 내부를 파낸 겁니다..


좀 자세히 보면 이렇습니다..


성벽 아래 돌로 다진 부분입니다.

그런데 길다랗게 파지요?

그건 성벽 모두 걷어내며 조사했다간 흙이 어떻게 쌓이는가를 알 수 없는데다

만약 그렇게 팔 경우 유적 전체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그냥 케잌 자르듯 일부만 잘라내어도 그 단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에 보일 사진처럼 토성을 어떻게 쌓는가, 성벽 내부 흙 상태가 어떤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여러분이나 저는 이 사진을 보고도 그냥 흙이 시루떡처럼 다르게 쌓인다는 것을 알아볼 정도지만

진짜 전공자들은 저 것만 보고도 머리 속엔 3D영상이 펼쳐지겠죠.


오른쪽면.


왼쪽면

처음 공개한 성벽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보러가는 길에

저를 부른 그 나쁜 선배는 여기가 해발 40미터야..란 말을 합니다.

병익미소녀는 숨이 차서 죽겠구만.. 어쩐지 한니발이 알프스 넘는것처럼 힘들다 했더만..

(눼, 성곽고고학을 전골할 수 있었는데 안한 이유가 이거죠. 난 너무 병약해. -_-;;;)

사고는 여기서 터집니다.


사고직전, 그들은 평온했고


아무도 그 다음 일어날 참극을 예상치 못했다. ;;;


이 바닥에서는 트렌치라고 부르는 구덩이를 올라가 성벽 내부의 상황을 보려는 차에

그만 미끌어졌어요.

들고 있던 카메라는 진흙 투성이가 되고 다른 손에 든 우산 손잡이 안쪽까지 진흙이 들어갈 정도.

뒤에선 연합통신, 마봉춘, 캐백수, (남)조선TV 카메라가 돌아가는데..

미끌링 미끌링 @# 미끌링~ 놀이를 했습니다.

(아니 프랑스 어느 방송에서 나오던 명랑운동회같은데서도 이런 거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만약 어딘가의 언론기사에 

더러움을 모르는 몸과 마음을 짙은 색의 교복으로 감싸고.

스커트의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얀 세일러 칼라가 펄럭이지 않도록, 

차분히 걸어야 할 것 같은 양갈래 머리를 한 병약 미소녀가

미끄러지는 영상 혹은 사진이 나왔다면 그게 접니다. -_-;;;;;;;;;;;;;;;;;;;;;;;;;;;;;;;;;;;;


사고순간!!


올라가서 봤으면 좋은 사진이 나올 법도 한데

겨우 나오니 올라갈 엄두가 안나더군요. 아니 다시 내려가는 것두 무서워.

마침 소지중이던 미소녀의 피수품 향기나는 물티슈 한 봉지를 소모하며

겨우 내려오며 현장설명회 관람은 끝이 나버렸습니다.

앞의 현장설명회 잘라먹고, 뒤는 미끌링 놀이에 잘라먹고

카메라는 겉면만 머드팩 놀이를 하느라 다시 쓸 수는 있었습니다.

옷도 신발과 바지 하단(스커트가 아니라니 속였구나 샤아~~~~!!)만 더러워지고

이 사고완 상관 없었지만 가방안의 블투 키보드는 망가지고(아침에 교환받았죠)

이래저래 고생만 했군요.

돌아오는 길은 광주에 사는 선배차를 얻어타고 광주까지 와서

소머리국밥 얻어먹은 걸루 마감했습니다.


이걸 보러 강릉행 버스는 꽉꽉찼다죠. 젝일!


고고학 얘기를 들으시려면 다른 곳 알아보시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죠.

과연 이게 일부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사부와 독도와 관련된 유적이냐...


우선 먼저 말할 수 있는 건 5~6세기의 신라 토성이란 문구입니다.

이것은 즉 이사부가 울릉도 땅따먹기하러 가기 전에 지은 것일 수도 있고

이후에 지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한 편년이 나오기 전에 이사부나 울릉도를 연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자들이야 관심을 끌기 위해 그런 문구를 쓴 거지만

읽는 사람들이 거기에 반응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또 최대규모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슬라주(강릉)의 정청이나

주요 군기지로 쓸 크기는 아닙니다.

마지막 사진 때 보겠지만 2차선 도로 바로 건너 바다가 있습니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그렇게 중요한 시설 안둡니다.

아마 강릉을 방위하던 성곽 시설 중 하나라고 봅니다.

아차산일대의 고구려보루들보다는 더 큰 단위가 머무는 것이랄까..

(이를테면 보루들이 소대, 중대단위라면 이건 대대, 연대급?)


또 하나 여담인데,

백제 멸망 후 신라와 당의 공격을 우려한 왜(당시는 일본이란 국호가 없었으니깐)는

백제계 도래인들을 동원하여 여러 곳에 성을 신축하여 방위태세를 구축합니다.

큐슈의 다자이후 앞에 수성水城이란 성을 쌓는데

성벽 안쪽에 저수지를 만들고서 적이 쳐들어 올 때 방어전면에 물을 방류해

적의 발을 묶는다는 방어전술을 사용하는 동아시아의 중요한 성입니다.

미끌어지며 체득한 것인데 수성의 방어전술은 나름 합리적이었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현장고고학!! -_-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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