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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구려사의 간단한 정리 4 – 고구려를 잉태한 환경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고구려사의 간단한 정리 4 – 고구려를 잉태한 환경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2. 11. 15. 16:19

본격적으로 고구려사 이야기를 함에 앞서서

과연 어떤 토양에서 자랐길래 고구려가 그런 역사를 가지게 되었느냐는 이야기를 먼저해야 합니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에 백인들이 자기들의 우월함을 환경결정론으로 수식을 했었죠.

그것은 결국 피압박민의 역사에도 적용되어 이런 환경에서 컸으니 이 모양이라

식민지배를 받는 게 앞으로의 역사에 도움된다는 ‘걸왕의 개가 짖는’ 소릴 했다지만

역시나 역사적 진화에 있어서 환경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환경이야기를 함에 있어 과거 제국주의 합리화 논리가 아니라

재레드 다이아먼드의 “총ㆍ균ㆍ쇠”처럼 

‘인간이 환경에서 거둘 수 있는 자원은 무엇인가’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꼭 그 환경이라고 그렇게 흘러간다는 공식은 전혀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구려 건국기의 자연환경을 이야기함에 있어 가장 먼저 이야기 해야할 것은

바로 진수가 쓴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의 한 대목입니다.

거기서는 3세기 무렵 고구려가 처해있던 환경을 아래처럼 묘사합니다. 


高句麗는 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朝鮮ㆍ濊貊과, 동쪽은 沃沮와, 북쪽은 夫餘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丸都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戶數는 3만이다.

큰 山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은 없어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의 물을 식수로 한다. 좋은 田地가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에 음식은 아껴 먹으나 宮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또 靈星과 社稷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번역은 국사편찬위원회)


나름 이 기록은 정확합니다.

진수(陳壽, 233년~297년)가 고구려를 방문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뒤를 봐주던 장화(張華, 232년 ~ 300년)가 이쪽에 나름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요동군 등의 군현에서 파견된 자와 방문한 상인들의 기록을 모은 것이기도 합니다.

한동안 동방세계의 대한 정보의 기본 데이터가 되었죠.

(남북조시대까지 만든 사서들의 동이전은 거의 삼국지의 서술에 덧붙인 정돕니다)


하여간, 아직 서안평이나 한반도 북부의 한군현,

그리고 요동지역에 뿌리를 박지 못한 단계의 고구려의 범위는

국내성 일대와 옥저 지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대략 이런 느낌이랄까요?


그때의 고구려 중심부의 자연환경은 위에 언급된 그대로입니다. 

09년에 가보기는 했지만 세세하게 살펴볼 여유가 없어서 뭐라 드릴 말씀은 없고

대신 일전에 소개한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에 실린

여호규 선생님의 초기 환경서술을 대략 요약해서 제 감상을 풀어넣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산지가 대부분인 지형입니다.

고구려 초기의 수도였다는 홀승골성(오녀산성)이 있던 환인지역은

1000m급 봉우리가 64좌나 있다고 합니다.

여호규선생님은 따로 어느 정도 규모의 면적에 64좌인지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아

이게 환인현 만족 자치구 변적인지 통화시 전체 면적 중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곳을 가기 직전에 홍천군의 독립운동을 돌던 도중에 본 산세나

오녀산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산세나 별 차이가 없어

‘강원도민으로서 저 시뻘건 간판들을 제외하면 향수병 걸릴 일이 없을 듯합니다’란

말을 일행들에게 했을 정돕니다.

오녀산성 옆 환인댐의 담수지역을 보는데 마치 소양호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강원도 영서지역과 별 차이가 없다는 거죠)

계속 정리하자면 삼국지의 기록이 말하는 것처럼 경지율이 매우 낮다고 합니다.

국내성이 자리한 집안현의 경우 경지율이 6.6%라 합니다.(이 또한 기준을..)


그냥 사진 고르기 귀찮아서 이어 붙였습니다.


대략 위와 같이 요약정리를 해봤습니다.(자세히 알고프면 책을 보자!)

보통 이런 환경을 언급하는 문헌의 경우 산간지대에 간간히 있는 충적 평야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보면 그 변적이 아주 좁지는 않아서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만

다시 그때는 지금과 같은 기술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땅의 한계는 매우 좁았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즘은 그나마 기술이 발달해서 

옛날에 못써먹던 땅까지 이용해 먹는 것일 뿐입니다.


강원 영서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환인시가 멀리 보입니다..


어차피 인구수는 고만고만했을 것인데

대개의 고구려 초기를 다룬 연구를 보면 인구가 자연 부양력을 초과했다고 합니다.

어차피 먹을 게 적으니 알아서 약한 개체는 사라지거나 해서 인구수가 균형을 이루어

그 자원 안에서 다들 알아서 먹거리를 마련할텐데

왜 인구가 늘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올까요?

요건 아마 추측입니다만, 어쩌면 고조선과 한의 팽창에 따라 

갈 곳이 없어진 세력들의 최후 종착지로 인구가 늘어난 것은 아닐까요?

(초기 연구자분들은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해주세요)


말꼬리 :

어떻게 하다 보니 1984년에 나온 “집안현문물지”를 구하긴 했는데

소녀의 무식으로 인하야 나랏말쌈이 아닌, 특히나 간체자로 도배된 백화문을 읽을 수 없는 관계로

자세한 정보 없이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로 끝을 맺습니다.

(불만 있으면 번역해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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