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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국천왕 16년 - 진대법의 시행. 과연 사회안전망이었는가?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고국천왕 16년 - 진대법의 시행. 과연 사회안전망이었는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1. 25. 13:45

원문

十六年 秋七月 墮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冬十月 王畋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 對曰 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 王曰 嗟乎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 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少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해석

16년(194)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백성들이 굶주리니 창고를 열어 곡식을 풀었다. 가을 10월 왕이 질양에 사냥을 나갔다가 길에서 주저앉아 울고있는 자를 발견하고 ‘어찌하여 울고있는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매우 가난하여 매번 품을 팔아 어머니를 모셨는데, 올해는 그럴 수가 없어 품팔 곳이 없어 도저히 한 되, 한 말의 끼니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웁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탄식하기를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나의 죄다’라고 하였다. 옷과 음식을 주고 그를 위로하였다. 이에 내외관리들에게 명을 내려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무자식인자, 늙고 병들고 매우 가난하여 능히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를 널리 수소문하여 그들을 구제케 하였다. 관리들에게 명을 내려 매년 봄 3월로부터 가을 7월에 이르기까지 관가의 곡식을 내어 백성들 가가호호의 사람 숫자에 따라 차등있게 빌려준 후 겨울 10월에 반납케 하는 것을 매년 정기적인 것으로 삼으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아주 오래전에 조선전사의 발해편을 볼 때였습니다. 북한 책을 처음 읽은 거라 그 생경한 정신세계에 멍~할 수밖에 없었는데 유달리 그 시대의 지배계층을 백성들을 고리대로 삥뜯는 봉건 모리배로 묘사하는 대목이 있어서 더 의아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사채업자 흉내를 내는 기록이 있었던가? 나중에 더 공부를 하다보니 진대법을 말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고리대인가에 대해서는 한참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마 고리대라는 말이 나왔다면 그 근거는 아래의 기록이 될 것입니다.

 

만약 가난하여 징수할 것이 없거나 공적ㆍ사적으로 빚을 진 사람에게는 모두 그의 아들이나 딸을 노비로 주어 보상 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주서 고려전

 

신라처럼 효녀 지은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들이 나온다면 모를까 고구려에서 고작 나오는 기록이 미천왕이 되기 전 을불이 음모라는 사람의 집에서 품팔다 개고생을 한 이야기, 그리고 온달이 걸식으로 밥을 구걸했다는 정도 밖에 없으니 뭐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자료가 확실한 게 없으니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겁니다.


다만 품을 팔거나 자기 스스로 먹고 살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사회분화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났고, 지금보다 인식이 낮았던 시대라 국가는 애써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기보다는 조지고 부시며 처벌을 하는 것밖에 할 수 없던 것도 사실입니다. 사회복지대책은 먼 훗날의 것입니다.


대개의 진대법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뭐 사실은 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지만요. 

세금과 관련된 모든 것을 봉건지배 모리배의 수탈로 보는 북한 책은 제쳐두고, 

사회분화에 대한 대책이라던가 몰락계층의 보호책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말이 맞는 것이 예속되지 않은 자유민은 국가의 돈줄이거든요. 

못살아서 누군가의 예속민이 되면 국가는 

세금원과 병력원의 감소라는 손해를 봅니다. 

나중에 골수까지 파먹은 사람들에 의해 시스템이 마비될 때까지는 

어떻게든 그들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여기서는 그 법이 고리대냐 사회안전망이냐를 따지는 것은 어렵고

(오늘 아침만해도 열이 식었다고 좋아했더니 약발 떨어진 지금 다시 상승하네요) 

다만 그 제도가 언제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냐에 대한 문제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풀어놓을 보따리는 많지만 제 몸이 못견딜 것이와염~☆)

 

앞의 기록에서 서리의 해를 입어 흉작으로 기아가 발생하자 

왕은 재빨리 곡식을 풀어 구제에 나섭니다. 

그가 왕궁 안에만 있었다면 

‘경사로세~ 경사로세~ 태평성대로구나’ 놀이를 했을 겁니다만 

사냥가는 길에 만난 한 사람과의 대화로 

이것이 충분치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왜그럴까요? 

그냥 아래 관리들이 자기 주머니로 바로 넣어설까요? 

그것은 아마 전산화가 완성된 지금도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이러한 수요는 돌발적이기 때문에 예측하기도 힘들고 

그 실태를 전면적으로 파악하기도 힘듭니다. 

거기에 누군가 자기 주머니로 들어간다면 그 양은 더더욱 줄어들 것입니다. 

당시의 고구려 사람들이 우습게 보이나요? 

우리나라에서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난 건 100년도 안지났습니다.

(요건 몇몇의 부정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기획ㆍ추진한 더 상위의 사람들 차원의 문제죠) 

보급에 있어서 최고라 불리는 미국도 

걸프전 이전에 ‘기브미 쵸코’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게 

수요를 초과해서 보내곤 했거든요.

(걸프전 이후론 의도적으로 푸는 물자가 아니라면

 재고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끔 제도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문제는 

그 제도가 매우 완성도가 높고 

현장에서도 제대로 수행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가끔 디스하는 IT블로거 & 댓글러들의 기술절대주의 착각하고 유사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 대해 강경한가 납득하세염!!) 

그러나 사실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하더라도 

그것은 탁상위의 시뮬레이션 단계지 

현장에서는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거든요.

(전 가끔 우리나라 헌법을 읽다 감격합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환타지라서..) 


십이국기라는 소설에서 재미난 일화가 나오죠. 

현대사회의 정신적 세례를 받은 나카지마 요코가 

저쪽 세계로 건너가서 경국의 왕이 된 후 세금을 10%로 감면합니다. 

나중에 왕의 수행을 위해 내려가보니 

가장 후한 곳이 50%, 가장 심해 

왕이 반란군에 가담해서 때려잡은(!) 고을은 80%를 뜯어가더라는 겁니다. 

유교경전에서도 10%, 더 나아가서는 5% 징수를 이상적으로 생각합니다. 

소작료도 그렇고요. 

그러나 현실에선 50%만 거둬가도 좋은 임금님, 자비로우신 주인마님이 됩니다. 

하여간 자기를 만나러 온 기린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분명히 지시했는데 

그럴 리가 없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윗공기와 아랫공기가 달라요. 

그래서 신라의 어느 왕은 

그렇게 다스린다면 나라가 망한다고 춤을 추며 경고하는 산신을 보며,

 이것이 태평성대의 징조라고 착각하고 혼자 좋아하는 게 됩니다.


어쩌면 고국천왕의 진대법 시행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사회보장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서가 편찬되던, 

아니 주서 편찬에 사용된 원기록이 작성되던 시점에는 

귀족들이 다 해먹은 시절이니 

정말 북한책에서 그러는 것처럼

(사실은 이분들은 전근대시대의 왕조국가의 지배체제에 대해선 모두까기 인형입니다. 

그래야 지덜 나라가 뽀대난다고 믿으니까) 

고리대로 변모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료가 없는 단계에서 또 다른 가정을 편다면 

기관을 설치하고도 예산배정한다는 생각은 없던 시대다보니 

운영재원을 백성에게서 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전근대시대 백성들의 고난은 단순히 탐관오리의 발호가 아니라 

탐관오리가 안되면 자기가 굶어죽거나 

기관 운영비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게 더 많죠.


아직 고구려 사회 내부에 대한 자료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 정도의 이야기도 소설이 되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다만 산상왕을 전후로 고구려사회가 매우 큰 변화 속에 놓여있었다는 증거가 되긴 합니다.


말꼬리 -------------------

조세에 대해 쓴 글이 있기는 합니다.

과연조세는 공평한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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