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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대사회는 혈통을 어떻게 중시하였나?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한국고대사강좌

고대사회는 혈통을 어떻게 중시하였나?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2. 6. 16:30

895년, 왕이 된지 9년이 지난 어느 겨울에 

진성여왕은 첫째 오빠이자 전전대 왕이었던 

헌강왕의 서자 요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웁니다. 

요는 왕궁에서 자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밖에 사냥하러 나갔다가 그야말로 야합하여 태어난 아입니다. 

당연히 친자문제가 불거질 수 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유전자 검사도 없던 시절, 

진성여왕은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을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등을 쓰다듬으며(드, 등짝을 보자!!) 

'우리 형제자매는 남들과 뼈대가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솟아났으니 

진짜 헌강왕의 아들이구나!!'라고 합니다. 

고대사회의 베르세르크. 

하지만 등짝만 쓰다듬고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진성여왕은 나름 지나치게 욕을 먹는 분입니다. 그분은 절대 저러지 않으셨다고 봅니다.. 정숙한 블로그라 아래는 잘라냈습니다. 궁금하면 원작을 보세요.


경문왕계 왕실의 고대복고적 성향까지 다뤄야 이해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게 필요한 분은 전기웅선생님의 박사논문이 

단행본으로 십수년전에 나왔으니 그거 읽으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다만 우리는 고대의 혈통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그저 흔한 막장드라마에서 그놈의 결혼이 주제가 되면 꼭 등장하는 단어가 있죠. 

뼈대있는 가문, 집안의 품격. 

비글견 수억마리가 지나간듯한 20세기를 겪으며 

좀 잘났다는 집안은 친일을 했거나, 독재와 타협했거나 

아니면 부동산투기로 인생핀 경우가 대다수일텐데 무슨 뼈대가 있을까요? 

그런 전근대의 마지막 잔광(last blitz of past)같은 이야기만 가지고 

고대의 혈통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아버지의 지위가 모든 것의 결정은 아닙니다. 

여기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바로 제의, 의식이 될겁니다. 

언젠가 온조왕대의 영토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온조왕 13년 - 내가 잘난 이유)

거기서 좀 빼먹은 게 있군요. 

신화를 만들고 거기에 덧붙아는 건 단순한 사기가 아닙니다. 

신비주의라는 양념이 들어가야 빛을 발합니다. 

바로 혈통에는 매우 신비한 것이 담겨져있다는 말입니다. 

정말 온조나 주몽, 박혁거세와 김알지의 자손들의 피에는 

여전히 그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겁니다.

비록 누가 보여봐봐봐~~해도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알게모르게 그들에게는 신이한 것이 담겨져 있기에

함부로 범접할 것이 아니다..란 의식이 있습니다.


고려말 신돈의 아들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폐위 후 죽임을 당한 

우왕은 죽는자리에서 옷을 벗으며 

우리왕실은 대대로 용왕의 자손이라 용의 비늘을 가지고 있다.

내가 신돈의 자식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있겠느냐는 말을 하지요.

(요건 언젠가 베트남 왕조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거기서 하구요)

고려까지는 고대와는 구별된 새로운 사회라고 하지만

여전히 천명이라는 것과 왕이 된 자에 대한 신비주의가 남아있죠.

조선시대는 그것으로부터는 탈출하지만 의례로서의 종묘제례는 남았지요.

(물론 조선시대 유교 어쩌구..로 태클거실지 모르겠지만

중국식의 국가 제의는 유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내려온 것이죠

요 얘기는 "상제님이 보고계셔"에 조금 썼습니다)


서양 중세의 왕에게 병을 고치는 신의 손이 있었다.. 

그 정도로 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고대의 왕은 단순한 조상식사대접이 아니라

자기의 통치의 정당성 및 피의 신성함을 보여주는 제의를 통해 재확인하는 거지요.

실은 가까운 조상일 수록 모두 같이 하다가 올라갈 수록 서서히 떨구고

가장 중요한 시조에게는 단 한 명만이 임하는 제사형식를 통해

고대 중국의 제왕들은 자신의 신성함에 대한 장치를 만들었지요.

조선 이후 가장 어른이 제례를 주관하는 것도

제사가 권력의 순위를 보여주던 원초적 기능의 마지막 흔적입니다.


알고 지내던 분이 양동마을 출신이셨는데

그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어릴 적에 동네 할아버지들이 먼저 달려와 인사를 하고

존대말을 하는 게 무척 이상했었다고요.

그건 아마 양반과 지주가 공존하던 시대의 영향력이 

그때만 해도 아직 죽지 않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고대로 올라가면 (현대인에게는) 더 괴기해집니다.

655년에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로 쳐들어옵니다.

무열왕의 사위였던 김흠운이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나는 용가리 통뼈라 도망은 안간다라며 자폭돌격을 해버립니다.

그보다 낮은 계급의 보기당주인 보용나가

저런 분들도 목숨을 버리시는데 나같이 늙고 천한 것이 살아서 뭐하냐고

그 역시 목숨을 버립니다.(보기당주면 그리 졸병도 아닙니다)

맨 처음 이야기한 진성여왕의 이야기만큼이나

김흠운의 전사와 보용나의 뒤따름은 이 시대의 신분관념이

단순한 뼈대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란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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