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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가끔 기록이 거짓말을 할 때,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1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가끔 기록이 거짓말을 할 때,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1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3. 7. 25. 22:37

양병우 선생님께서 쓰신 역사의 방법이란 오래된 역사학 개론서를 보면

로마제국의 금석문 중에 투리아의 비문이라는 게 나옵니다.

투리아라는 아내가 죽자 남편은 그녀의 묘비에 뻥이란 뻥은 다 써넣었지요.

그 비문 그대로를 믿으면 요즘말로 골룸이 됩니다. -_-;;

우리나라에도 그만은 못하지만 구구절절한 비문도 있지요.

본인이 효자로 이름났던 최루백이란 사람의 아내 염경애의 묘지명입니다.

(그 당시로도 여자에게 이름을 붙이는 건 매우 의례적입니다..)

효자이긴 한데 그 잘나가는 수주(수원) 최씨의 일원이면서도

그다지 잘나가지 못한 가계 출신이라

(잘나갔으면 아버지가 산에서 호랑이 밥이 되고 

아들내미는 또 그걸 찾아서 죽여 배갈라 시신 수습하는 고생 안하죠)

딸부자집 개경 귀족 염덕방의 과년한 장녀를 맞아 살림이 폅니다.

나름 전략적으로 선택받은 거죠.

이제 좀 최루백도 어엿한 관리로 자리잡나 했더니

그만 염경애가 죽습니다.

남편은 절절한 마음을 담아 묘지명을 씁니다.

아주 오래전에 과일촌씨가 한국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역사가란 

개드립이 나오던 시절에 역사스페셜에서 다룬 적도 있습니다.

(양은 양촌리 둘째아들, 질은 형수님이 더 나았다는 것이 개그)

그거만 보면 수절할 것 같았던 최루백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또 재혼하여 3남 2녀를 둡니다.

그냥 염경애의 묘지명만 읽으면 그냥 순정만화 읽듯 펑펑 울다

(접시꽃 당신이라도 되는 양)

자기 맘대로 역사상을 상상해내곤 만약 후일담을 듣는다면 화를 내겠죠.

그때는 우리와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이 아주 다른데요.


가끔 후대의 역사적 기록보다 당대의 금석문이 중요하단 말을 합니다.

맞아요. 맞습니다. 그렇고 말구요.

어떤 기록도 당대에 쓰여진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발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대에 쓰여진 것이니만큼 

당사자들에 의해 꾸며지거나, 제한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끽해야 동천왕 대나 신라구경을 했을 것이고

백제한테는 오히려 두들겨 맞는 일이 더 많았는데

"백제랑 신라, 걔들은 원래 내 빵셔틀임"

이런 말을 광개토왕릉비에서 보고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무래도 당대의 기록은 정치적입니다.

물론 후대의 것도 정치적 입니다만, 당대의 기록만이 결코 숭고한 것만은 아니란 겁니다.


또 아편전쟁에서 청은 처참히 깨지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습니다.

보진 못햇지만 청실록에는 그렇게 적혀 있다면서요.

머리 노란 오랑캐들이 하도 (집에 애가 굶는다고) 애걸복걸 하길래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는 어여삐 여겨 어촌 5개 정도 하사하셨다고요.

그것만 보면 영국은 정말 가난하고도 어려운 상태에 놓인 나라였군요.

(그런 나라가 지구상 육지의 1/4를 먹었을 리가요..)


가끔 기록이 말하는 행간을 유심히 살피지 못하면 이상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아래는 최루백처 염경애 묘지명 해석본입니다.

참고자료니까 가려둡니다.



말꼬리 ----------------

염경애 묘지명 사진 하나 넣어볼라 했더만 걸리지 않네요.

네이뇬과 다음에 최루백처 염경애 묘지명이라는 정식명칭을 넣으니

걸리는 건 짐순이 블로그..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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