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문화가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 본문
작년에도 슬쩍 링크시킨 글이 있는
전규현님의 블로그에 재미난 글이 올라왔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현장의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꾸준히 글을 쓰시는 진짜 전문갑니다.
(이상한 건담 메타포나 흘리고 원사료에 모자이크나 하는 10대랑은 달라요)
오늘 올리신 글은 주어랑 목적어 몇 개만 바꿔도
역사에 대한 글이 됩니다.
뭐, 하나의 신기술이나 문화가 들어오면
무슨 제식훈련하듯 착착 바뀌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석시시대 청동기가 들아오고, 청동시시대에 철기가 들어오고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뭔가 들어오면 그걸로 일제히 바꾸고..
무슨 문화가 쿼드코어 들어오니 전부 쿼드코어쓰고
스마트폰 들어오니 개나소나 그것만 쳐다보는 현재와 동일시 해버려요.
사실은 거기엔 매우 고통스런 수용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북위 낙양성과 당 장안성 배치도. 출처는 나라문화재연구소, "平城京奈良の都のまつりごととくらし" 2010, 74쪽.
어느 글에선가 재미있는 걸 읽었는데
일본의 초기 도읍인 후지와라쿄(등원경)는
당시 도성으로는 특이하게
왕궁이 수도 한가운데 위치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주례에나 나올듯한 도성 내 왕궁배치는 북위의 낙양성에서도 보이지만
이 시대 이후 왕궁위치의 대세는 북쪽입니다.
군주는 남면한다는 이상에 가장 맞는 것이죠.
그런데 후지와라쿄의 배치에 신라의 영향이 강했다는 설이 있더군요.
백제를 도와 당과 싸웠기 때문에 한동안 접근이 제한된터라
(게다가 나당전쟁 초반에 신라의 손을 들어줬죠)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건설함에 있어 신라의 영향이 지대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당시 신라가 가지고 있던
북위 낙양성에 대한 자료를 얻을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신라의 도성배치가 애초부터 도시 중앙에 위치하였고
북쪽에 자리한 도성배치는 수나라부터 해온지라
그 당시 일본사람들이 중국 안간 것고 아니니 정보가 없었을리가요.
만약 일본에서 등원경의 위치가 그러하다면
오히려 일본의 문화나 사회적 기반이 가운데 두길원했을 겁니다.
후지와라쿄 모형, 출처는 나라문화재연구소, "平城京奈良の都のまつりごととくらし" 2010, 78쪽.
별도로 다룰 예정이지만 당의 율령시스템을 받아들인
신라와 일본의 차이도 이런 문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신라는 망하는 그날까지 3성 6부제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만 표피적인 몇 가지를 첨가하고 이름만 고쳤을 뿐이죠.
그러나 일본은 독자적인 기관을 설치하긴 하지만
일반 내정에서는 지나치게 당의 카피본의 길을 갑니다.
이건 뭔가가 들어올 때 그 사회의 기본시스템이 얼마나 탄탄하냐,
그걸 받아들일 필요를 절감하냐 등등의 이유도 감안해야 겠죠.
마지막으로 IT든 정치든 뭐든 결국은 사람이 만들어갑니다.
표피적인 것은 매우 다르겠지만
그걸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니까요.
말꼬리 --------------
사이릭스-크루소-아톰으로 이어지는 저력칩, 2G폰 사용자로서 쓸데 없는 자존심 작렬..
지가 액시즈로 건너가 저항을 지속하는 지온군인줄 알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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