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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묘지명을 읽을 때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할 것..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자료로 보는 고대사

묘지명을 읽을 때 다시 한 번 생각해야할 것..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2. 26. 03:00


무령왕릉 매지권, 엄밀히 말하자면 얘도 묘지명의 사촌뻘..



지난주에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중국의 고구려와 백제계 유민의 묘지명에 대한 세미나에 다녀 왔습니다.

거기서 보고 들은 것이 꽤나 자극도 되었고,

한참 읽고 있던 것에 도움 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뭔지는 비.밀!)

그런데 뭔가 초점이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어서 간단히 적어볼까 합니다.

 

우선 가장 먼저 묘지명이란 것에 대한 개념부터 잡아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묘지명이란 것의 사전적 의미 뿐만 아니라

이 것의 성격이 무엇인가란 문제가 그렇게 이야기 되진 않았달까?

가장 두드러졌던 예가 묘지명이 사찬이냐 관찬이냐하는 논쟁이었습니다.

(관찬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펴내는 것을 말하고 사찬은 개인적으로 짓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짐순이가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이 이거였습니다.

당육전에서 비서성 저작랑이 묘지명을 작성한다는 대목이 있고,

또 황제가 '야, 쟤 묘지명도 지어라'라고 명을 내리기도 합니다.

(이건 묘지명의 기본 개념을 다룰 때 해야할 얘기지만요..)

그렇다고 그걸 관찬으로 봐야한다고 보는 것은

묘지명이 왜 귀족제가 유지되던 시대에만 유행했는가,

또, 사대부의 시대에 행장이라는 것으로 대신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드러낸 겁니다.

 

이를 테면 최치원의 저작으로 알려진 사산비명,

즉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숭복사지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를 말합니다만

이 비석들은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고승들의 사후 그를 기리는 비문을 작성한 겁니다.

분명 왕의 명으로 지었으니 형식적으로는 관찬이지요.

최치원에게 고승의 문도들이 제출한 자료를 참고하여

그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비문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관찬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없어집니다.

고승 개개인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정작 최치원이 사용한 글감은 중국 고전이 거의 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정교로 삼은 시대도 아니니

일부러 불교를 깎기위해 불교 승려를 기리는 비문에

중국 고전과 역사로 채운 비문을 썼을리는 만무합니다.

정말 이것이 신라 정부의 공식적 견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보통 묘지명은 땅에 묻는 것이니 볼 사람이 없어서

규제에 덜 구애받는다고 이해하고 계시지만

고려 시대를 봐도 그건 맞는 말이 아닙니다.

(특히 묘지명이 유행한 위진남북조나 수당시대를 봐도 그렇습니다)

귀족이 사회의 주력 세력인 시대의 공통점은

자기 피의 고결함을 항상 과시를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황제던 왕이던 높으신 분이 쓰라고 했다는 사실은

가문의 명예가 됩니다.

그냥 묻어서 침묵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고의 사본은 남겨 널리 두고두고 읽히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 고려 후기 묘지명의 상당수는

문인들의 문집에 실려있던 것이죠.

죽은 자는 말이 없을 진 몰라도

묘지명은 묻혀 침묵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문장이 다른 귀족들의 미담들과 충돌할 경우

정말 머리 아픈 일이 벌어지겠죠.

 

표면적인 형식이야 관찬의 틀을 지닌다해도

사실은 '우리 집안 대단함~, 황금송아지 있음!'을 뽐내야 하는 사적 욕구가

묘지명 작성을 좌우한다는 겁니다.

그렇닫고 이것을 사찬이라고만 할 수 없는 것이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국가, 다른 귀족들과의 조율도 있겠지요.

그걸 생각하지 않고 저런 부분에 매달린다는 것은

무슨 고대, 중세의 국가운영을 조선시대 같은 틀로 이해하려는

무의식적인 관념이 작용한 것이랄까요.


묘지명은 당대의 기록입니다.

일정시간 후에 만들어진 자료보다 더 주목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금석문을 읽을 때 주의할 것은

이걸 어떤 의도로 작성했는가란 것을 더 고민해야하는 겁니다.

보통 이런 묘지명에 떳떳하지 못한 내용은 적지 않거나

미화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668년에 평양성의 문을 연 반역자 중에 오묘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 자는 나중에 당으로 건너가 어느 정도 잘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장안에서 고구려 유민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맞아 죽습니다.

이를 테면 이완용을 죽이려한 이재명 선생의 원조라까요.

그러나 얼마 전 발견된 그의 묘지명을 보면

그냥 하늘이 불러갔다는 식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꾸며 서술합니다.

마치 묘지명을 조선시대 사관이 기록한 것처럼 생각을 한다면

큰 실수를 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장은 어느 왕조의 1대가 큰 강을 나뭇잎으로 건너고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만든다는 수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걸 검증하지 않고 그대로 믿으면 어떻게 될까요?

 

달을 봐야하는데 손톱의 때만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고려시대 묘지명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최루백처 염경애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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