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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양원왕 7년, 돌궐의 공격은 실재했을까?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양원왕 7년, 돌궐의 공격은 실재했을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4. 4. 4. 14:32

원문

七年 …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해석

7년 가을 9월에 돌궐이 쳐들어와 신성을 포위했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군세를) 옮겨 백암성을 공격하니 왕은 장군 고흘을 보내어 1만 명을 이끌게 하였다. 막아 무찌르니 죽여 얻은 적의 수급이 1천여 개였다.


547년에 신성과 백암성의 방어시설을 재정비한 이야기는 한참 전에 했습니다. 과연 그로부터 4년 후인 551년에 북방의 돌궐이 쳐들어와 신성과 백암성을 각각 공격하고 있었지요. 짐순이는 고구려의 6세기를 매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전반기의 치열한 정치적 혼란, 그리고 후반기의 급변하는 국제정세, 그리고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라할 온달까지.. 앞시대와 뒷 시대만큼은 아니어도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551년의 이 돌궐의 공격은 그해에 있었던 백제와 신라의 북진과 맞물려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요. 어쩌면 백제와 신라의 북진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은 것은 돌궐의 침공, 그리고 북제의 압박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수순이었습니다.


특히나 고구려의 후반부의 역사를 볼 때 치열한 전쟁의 역사를 대개는 598년의 수문제의 공격, 또는 612년의 수양제의 1차공격으로부터 봅니다. 하지만 고구려에겐 이때부터가 이미 극도의 전시상황에 돌입합니다. 


북위의 멸망이래 요서와 몽골고원에 가까운 지역은 일시적으로 힘의 공백지대가 됩니다. 초원은 유연이 장악하지만 이 일대에 강력한 영향력을 투사하진 못합니다. 그때 이 지역은 중국의 북방을 차지한 국가와 초원국가, 그리고 고구려가 미묘하게 마주하고 으르렁거리는 화약고가 되지요. 실제로 수가 이 지역을 확고히 장악하기까지 서로 교묘한 외교전과, 그 일대 소수부족들의 회유와 압박, 그리고 소규모의 군사행동으 치열하게 벌어지는 공간입니다. 고구려는 유연과 어느 정도 가까운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돌궐이 유연을 무너뜨리고 초원의 패자가 되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어느 정도 방치도 하던 유연과 달리 돌궐은 직접 자기의 이권을 찾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지요. 그리고 화북지역을 장악한 북제 역시 뒤질새라 뛰어듭니다. 때로는 상인을 가장한 기습공격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는 그 지역의 토착세력을 누가 포섭하느냐, 그리고 대규모 친정에 의한 주도권 서점시도 등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지요.


대다수는 한강유역을 두고 벌어지는 각축전에 관심을 보이지만 결코 이 부분도 떼어놓아서는 곤란한 부분입니다.(다행히 이 부분에 대한 연구성과들이 꾸준히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록 자체의 신뢰성 문제입니다. 

돌궐은 아직 이 일대에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유연을 무너뜨려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는 게 

이 다음해인 552년입니다. 

물론 돌궐의 원주지가 요서와 가까운 곳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입니다만 

애석하게도 돌궐의 발상지는 서쪽입니다. 

유연도 물리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요하인근에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유목민족의 군사행동은 농경국가와 달리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경우도 있지만 

중앙아시아의 위치한 종족이 

갑자기 동북아시아에 나타나는 것은 무리에 가깝습니다. 

유연도 거의 죽어가는 상황도 아니었구요.


첫째는 시간기록이 틀렸을 가능성, 

둘째는 그 기록 자체가 아예 틀렸을 가능성, 

즉 다른 집단의 공격이 돌궐로 잘못 적혀있을 가능성. 

이렇게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 그대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어보신다면, 

짐순이는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답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은 현재로서는 이 기록의 진위를 파악할 근거자료가 무척 적습니다. 

비빌 그릇이 있어야 비빔면을 먹지요. 


다만 일단 551년에 돌궐이 왔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유목민족의 영토관념에 비추어보면 

일정정도 되는 다른 군사집단을 무사히 통과시켜주지도 않고,

(문제는 돌궐과 유연의 관계가 악화되는 시점이므로) 

또 보급에 대해선 농경국가들보다 부담이 덜하다 하더라도 

굳이 여기까지 와서 군사행동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요. 

물론 고구려가 유연과 가까웠다하나 

유연의 본진도 안 건드린 시점에 굳이 먼 곳으로 돌아가서 

군사행동을 벌일 이유가 없지요.

일시적 양탈행위나 무력시위라며 모를까

유목민족의 대규모의 군세로 요새를 공격한다는 것은

전면전 하겠다는 이야기인데요. 


기록이 틀렸다고 하기엔 너무 구체적이지요. 

이 당시에 요서지역이 화약고가 되어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평화로웠을리도 만무합니다. 

또 고구려가 한강유역은 물론이고 

가장 오래 보유하던 영토인 함경도 동해안까지 빼앗기고도 

반세기나 잠잠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구려가 신라에 대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시점은 

려 600년 초반의 일입니다. 

뭔가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혹시나 있었을 소수 부족과의 국지전을 돌궐로 옮겨적어 

무대응과 영토상실의 핑계로 삼았을 가능성도 어려운 것이 

실제로 나중에 돌궐과 북제-수와 갈등이 일어나기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은 좀 더 지켜봐야겠다..

이렇게 임시변통의 해답을 내놓아봅니다.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293쪽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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