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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명왕 1년, 졸본 옆에 바다가 있었는가? 본문

삼국사기를 읽어보자!/고구려이야기

동명왕 1년, 졸본 옆에 바다가 있었는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7. 2. 23. 14:22

삼국사기를 고구려본기를 읽던 중에 좀 이상한 대목과 마주쳤지 말입니다.


원문

王見沸流水中 有菜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徃尋, 至沸流國. 其囯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


해석

왕이 비류수에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게되어 사냥을 나가서 찾아보았다. 그 나라 왕 송양이 나와서 말하기를 "과인은 바다 구석에 치우쳐 살아... .... ."


간만에 모자이크로 짐순이의 미노프스키 핵융합로는 과열상태!

엥?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왜 그동안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아무 생각도 못했을까요?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 흘승골(길림성 통화시)은 바다는 커녕 상으로 칭칭 감겨진 땅입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해도 바다는 없습니다. 


마침 오녀산성에 올라가본 분중에 춘천 분이라도 계신다면 성 아래 보이는 거대한 호수를 보며 '드넓은 소양, 미 항모가 와서 정박하는 드넓은 바다..' 이런 드립이라도 쳐볼텐데 (사실 소양호처럼 이곳의 호수는 나중에 댐이 생기고 물이 갇힌 것이죠) 원래 고구려 사람들은 그나마 수량이 많다는 물을 보려면 더 북쪽의 경박호로 가던가 남쪽 집안으로 내려와 압록강이라도 보는 것 밖에 없지요.


그래서 국편에서 제공하는 삼국사기에는 "과인이 바다의 깊숙한 곳에 치우쳐 있어서"라고 해석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나 칠 수 있는 드립이지. '산 너머 남촌에는 뭐가 있길래' 궁금해할 정도의 내륙 산촌에서 할 말은 아닙니다.


차라리 김해나 양산에서 바다 드립을 칠 수는 있어요. 2천년 전에는 지금볻 해수면이 높아 양산이나 김해에도 바다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신라 때는 경주의 외할 구실을 한 지금의 울산 시내 상당수도 바다였습니다. 그러나 졸본까지 바다가 들어오려면 거대 자연재해가 아니고서는 어렵습니다. 


왜 이런 모순되는 기록이 나왔을까? 고대 기록은 기본적으로 모순 덩어리긴 합니다. 일부러 후손들 엿 좀 드시라고 그렇게 적어놓은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단편들의 집합이어서 그렇습니다.


어쩌면 단순한 오자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구전으로 전해지다 문자기록으로 남은 과정에서 착옥 생겼을 수 있고, 문자기록으로 정리중 당시 상황을 알지 못하는 후대 편집자들에 의해 잘못 기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김부식이 기록하기까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태초의 "유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정리했다는 "신집", 그리고 통일신라에 자료 정리를 거쳐 살아남은 기록들, 그리고 고려초의 이른바 "구삼국사"에 이르기까지 천년 넘는 동안 이어지고 전해지며 버그가 생겼을 수 있습니다.(눼, 이상은 우리 부식옵하가 그럴리 없다고 믿는 빠수니의 방패질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정말 바다 가까운 곳에 비류국이 바다 근처에 있었다..겠죠. 이른바 고구려는 조올라, 조올라 큰 대제국임을 믿고 싶었던 사람들은 "환단고기"의 틀 속에서 조선의 제후국이었던 나라들의 위치를 재조정하거나 국가가 세워지자마자 대영토였다는 망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비류수를 두만당으로 보거나항 비류국을 동해안 언저리로 보고 나라 세우자마자 거기까지 침발랐다고 주장할 가능성. 그놈의 다물.. 자~자~, 환빠들 거기까지..


그러나 고대 국가기록은 한번에 반죽을 해서 만드는 빵이 아니라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중첩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까 만세일계의 왕조기록이 아니라 고구려가 처음 생성될 때 참여한 여러 집단의 다양한 기억들이 하나의 기억으로 재배열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계루부 왕실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로 재편집하는 겁니다. 유리왕대에 그런 의심을 확인시켜줄 것같은 대목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백제 초기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종종 이야기했는데 특정 사실의 소급적용일 수 있습니다. 백제본기 온조왕대 기록을 보면 나라를 세우자마자 북으로는 황해도, 동으로는 춘천 남으로는 안성천(?)까지 영역이 펼쳐지는데 이는 사실 후대의 사실을 소급적용한 것이죠.<자세한 내용은 요오기~!> 이 기록 역시 나중에 동해안으로 영토를 확장한 사실이 교묘하게, 아니면 혼란 속에 연대가 올라가 시조의 위업으로 편입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 어느 것도 확실하진 않습니다. 아니 이 글을 쓰는 짐순이부터가 지금까지 써본 가능성 전부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모순되는 점이 하나둘 보이는 게 아니거든요. 개인적으로 드립의 오류라 믿고 싶지만 어느 것도 자신하지 못합니다. 다만 이런 게 있더라 억지로 짜맞추는 해석은 하지 말자는 거지요.


말꼬리 -------------------

춘천 소양해 드립은 서울서 처음 온 사람들 놀려먹기 좋은 소재였지요. 육지엔 캠프페이지, 바다엔 미 항모가 가끔 입항하는 거대 군항. 아 사기쳐서 죄송해염.


- 0223 15:20

페친인 동북아재단의 이정빈선생님이 알려온 바에 따르면 海隅에는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뜻도 있군요. 그러니까 오늘의 글은 망글!!!!!!!!!! "쳇! 인정할 수 밖에 없군. 내 어림으로 인한 과오라는 것을."(인정할 수 없다는 뿔달린 빨간 로리와는 다르다! 빨간로리와는!)

앞으로도 계속 이불킥 좀 하라고 남겨둡니다.


- 0227 12:08

역시 페친인 게명대 윤진석 선생님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僻在海隅란 구절 자체가 '벽지에서 태어나..'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뭐, 무식을 은폐하려고 해도 이미 '쪼끔이나마' 알려져 감출 수단이 없음.


벌써 이불에 구멍이 나기 시작..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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