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동성왕 때, 백제의 영역이 한강유역에 미쳤다는 것에 대해 본문
어제 거의 좀비가 된 상태에서(뭐긴 뭐겠어요. 잠을 안잤으니..) 지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백제 동성왕 때 백제가 한강유역에 다시 들어갔느냐 아니냐에 대한 질문이었는데.. 뭐, 그 것에 대한 논문을 보고 의문이 들었답니다. 이래저래 한 40분 가량을 그 문제에 대해 통화를 했지요. 이란 그 논문에서 나왔다는 영유와 점령의 기본 개념, 그리고 한성 함락 후 백제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 개괄..
고고학이야 담을 쌓고 사는지라.. (생각해보니 짐순이 주변엔 고고학자들이 고대사 하는 사람들보다 몇 배 많습니다.. -_-;;)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분명 한강 이남에 고구려 유적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또 백제의 흔적이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고 (물론 기록만 놓고 보면 500년이니 아예 안보인다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또 고구려의 유적이라 해도 전면적인 지배라기엔 그 내용이 군사 주둔에 가까운 것들로 편중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돌아가셨거나 초원로가 되신 분들의 시대엔 백제는 무령왕 때 다시 재기에 성공하여 성왕 때, 그러니까 551년에야 다시 한강유역을 되찾는다.. 이것이 아주 기본적인 사실처럼 인식되었습니다. 그것이 좀 지나서 더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생각해보니 이 분들도 이젠 소장파는 아니군요. 앞선 할배들에 비해 상대적이지만..) 무령왕 때부터 한강유역에 어느 정도 파고 들어갔었다는 인식이 자리잡습니다. 어린 짐순이도 거기에 동조합니다.
일단 고구려의 입장에서 봐도 고구려의 남진은 가장 왕성했을 한성 함락 전후로 서서히 힘을 잃습니다. 물론 중원고구려비에 보이듯 장수왕은 신라 내물왕에게 "다리 밑으로 당장 튀어와라. 10초 준다. 9초도, 11초도 아닌 10초다. 횽아가 다 널 사랑해서 패는 거다" 이런 느낌으로 세력의 우열을 정리하는데 서서히 고구려가 남쪽의 두 나라에게 내리 꽃는 힘은 약해집니다. 물론 장수왕 사후 문자명왕 때까지는 주로 고구려가 남쪽의 두 나라를 팹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방어가 더 많아지죠. (전화상에선 여기엔 좀 더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아주 간략하게 두리뭉실 넘어갑니다. 지면문제도 있지만 짐순이 머리는 손예진처럼 머리 속에 지우개 밖에 없어서요)
백제의 시각에서 보자면 한성 함락 직후 문주왕과 삼근왕의 시대에는 움직이지 않는 이카리 신지 같아요. 도망가면 안돼, 도망가면 안돼.. 백제의 영역이 이 때 충청도에서 전라도 일원까지 미쳤다고 보지만 (일부에서는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손에 들어가지 않은 별개의 공간이라 보기도 합니다) 당시의 지배기술을 생각하면 국경선이라 그어놓은 공간마저도 완전하게 지배를 하고 자기의 색깔을 물들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백제 왕실, 혹은 백제의 공권력이 잘 먹혀든 것은 경기도 일원이죠. (어떤 이들은 그것마저 어렵다고 보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하여간 500년 중심지를 상실하고, 핵심 인력의 대다수가 죽거나 포로가 되는 등 거의 나라가 망했다고 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상황인데 그 깎여나간 국력이 그렇게 일거에 회복될 수 있을 수 있는가, 그런 순수한 의문이 샘솟지요. 인적, 물적 자원이 거의 방전된 것과 마찬가지에서 그 회복을 일시에 회복할 수 있는 힘이 충만한 것도 아닌 상황인데 그런 시스템의 결손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복구가능한 것인가? 현대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 쉽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여러가지 복잡한 요건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매우 희소한 사례이지요. 그런 특수한 사례를 고대에 적용시킬 수 있느냐.. 한숨만 나오죠.
실제로 공주로 천도한 이유도 극단적으로 방어에 치중한 것이었고 고고학적인 자료로도 공주 초반의 백제는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왕릉급 고분은 기존에 있던 다른 무덤을 분해해서 만들었을 정도니까요. 그리고 충청도 일원까지 고구려의 손길이 미칩니다. 그게 일시적인 군사작전을 통해 남겨진 유'실'물도 아니고 어느 정도 지속된 시간 존속한 것으로 보이거든요. 뭐 해보기도 전에 암살당한 문주왕과 삼근왕의 시대에는 공주인근에서 방어전을 펴는 게 고작이고 어느 정도 백제가 혼란을 딛고 안정을 찾아가는 게 동성왕과 무령왕의 시대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동성왕은 큰 불을 일단 끄는데는 성공했고(하지만 역시 암살발라 모굴리스) 무령왕대 와서야 그나마 살림 펴기 시작하죠. 그때도 살림이 펴지는 게 아니라 다시 뛸 수 있는 여력을 만들었다지요.
그게 과연 정확하냐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도 없이 그 자료만을 바라보고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방법론 상으로 만용에 가깝습니다. 모든 자료가 다 하나의 방향을 보여주지도 않아요. 현대사에서도 자신이 처한 위치나 경험에 따라서 어느 사건이 민주화 운동이 되거나 폭동으로 불리기도 하죠. 전체적인 틀, 그러니까 백제의 웅진시기 초에 대한 연구를 하겠다면 자꾸 백제 웅진기의 일부 자료만 보지 말고, 앞선 한성기와 웅진기 후, 사비기를, 동시대의 중국, 고구려, 백제, 일본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옷감을 짜야죠. 그리고 역사만 보는 게 아니라 정치, 군사 그런 사회과학적인 면도 봐야 합니다. 그냥 이러지 않을까가 아니라 어느 정도 실제 사례들을 머리 속에 넣고 이 경우는 어떤가를 봐하야죠.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는 정말 자기 연구주제만 보는 매우 좁은 시야의 방법론상 문제도 있지만, 진짜 제대로 역사공부를 하고 있지 않다는 거죠. 물론 자기 주제라는 전문성은 연구자의 필수요건이지만, 그것도 역사라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야기 해야하는 것을 망각했다는 겁니다. 난 고대사를 하니깐, 고고학을 하니까 발굴현장만 알면 된다, 또는 삼국사기만 달달 외면 된다는 얄팍한 방법론의 문제라는 것.. .
이글을 쓰는 동안 짐순이의 책상에 백제 웅진기, 고구려 3세기의 체제정비와 6세기의 삼국의 영토쟁탈전, 8세기 중후반의 통일신라 정치환경에 대한 자료가 동시에 펼쳐져 있었지요. 그 옆에는 시대구분론에서 시간에 대한 이론, 북한의 한국사 연구동향, 덩달아 제1공화국 때 강원도의 정치상황.(책상의 책 曰, 이봐, 우리 중에 누군가 간첩이 있어) 뭐 세밀하지 못한 성격이라 그냥 큰 그림을 그리는 걸 선호하게 된 탓도 있지만. 전반적인 큰 틀을 놓치면 그것은 역사연구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거든요. 설령 고구려사에 대해 약간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를 둘러싼 전반적인 환경에 대한 이해는 놓쳐서는 안된다는 믿음. 그게 짐순이 공부의 전부입니다.
분명히 사료에는 한강유역에서 활동하는 백제의 흔적이 보입니다. 고구려도 551년 이전에 좀 물러나는듯한 느낌도 주긴 해요.(물론 정확한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551년 이전에 백제가 한강유역을 되찾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군사작전을 어떻게 봐야하나.. 그걸 고민하는 지인에게 꼭 군사작전은 점령전으로만 이어진 것도 아니고, 고대의 인구주거, 취락 밀집의 분포가 현대처럼 그렇게 입체적이진 않다는 걸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매우 입체적이고 복합적으로 토지를 이용하고 있지만 그 시절에는 점과 선을 잇는 듯한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국경선을 넘어서 종심깊은 침투가 가능하지요.
마치 남북한의 국경선은 현재 휴전선에 걸쳐있지만 특수부대의 운용과 항공기 & 미사일전력은 그 범위를 넘어서 투사될 수 있지요. 라팔과 F-15가 경쟁할 적에 가장 우선시 된 것은 양강도, 자강도 일대의 군수기지도 타격가능한 것이었지요. 무령왕 때, 한강유역에서 볼 수 있는 군사행동은 그런 각도로 생각하면 안될까요?. 군사작전의 활동범위가 넓어졌다. 방어일변도에서 적극적인 공격행위로 당시 백제의 군사교리가 바뀌었다.
때론 역사 연구자들이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이분론으로 역사적 사안을 해석하려는데, 일레로 우리는 식민지의 군사적 활용에 대해 학병과 징병만을 알지만 파트타임으로 운영되는 방법까지 다양하다는 것은 모릅니다. 1차 대전 때 동아프리카 독일식민지의 파트타임 1개 중대가 영국의 인도여단을 박살낸 적이 있지요. 역사책을 읽으며 하나만 생각하고 그것만으로 너무나도 다른 상황을 재단하려는 게 과연 옳은 연구일까요?
말꼬리 -------------------
1.
10월 1일에 쓰다 수면부족으로 방전되어 쓰지 못한 글을 오늘 올립니다. 얘 때문에 밀린 글이 좀 됩니다. 응가차야, 응가차! 지금도 그제는 4시간, 어제는 1시간, 오늘은 5시간 잔 상태라 지금 상태도 그닥. 방치된 아 바오아 쿠에 짐순이 좀비가 어슬렁거리는 공포영화 찍는 기분.
2.
어제 3대의 윈8 컴에서 클라우드로 연계된 특정 앱이 맛가고, 그 중 하나는 부팅이 안되어 8.1 USB 꼽고 안전모드에서 복구 돌렸더니 완전 초기화! 2주동안 세팅한 게 사라졌습니다. 생존을 위해 어제도 잠을 10시간은 잤어야 했는데.. 이런 사고는 기술만능주의를 다시 생각케 합니다. 그놈의 블로그로 찬양하는 것들도 리비아 사막의 독일전차와 같달까..
3.
가슴이 답답할 때는 모든 인류의 발상은 평양이라는 부카니스탄의 고고학 학술지를 보는 게 최고인 것 같군요. 대동강문명론 앞에 그깟 환단고기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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