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과연 언제부터 절이 산에 지어졌을까? 본문
오늘 춘천 북쪽의 어느 산에 올랐습니다. 무슨 공사를 하는 중에 옛 절터로 보이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짐순이가 마지막으로 산에 오른 건 09년인가 백두산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막전수전공중전우주전도 다 겪어본 역전의 용사지만 아아.. 산악전은 정말 싫어요. 그래서 산은 안가는게 최고이고, 산은 올라가 밟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고 음미하는 것이 신조였습니다만.. 아아.. 길도 없는 곳에서 미끄러져 옷 다버리고.. 히잉..
그냥 전화기로 찍으나 노트북으로 찍으나 사진기로 찍으나 짐순이 사진은 거기서 거깁니다..
산에 올라 바라본 춘천시내. 좀 있다가 좀 더 넓게 펼쳐진 풍광이 있었지만 그땐 그럴 정신이.. 요때까진 제정신.. 뒤에 나올 사진도 중요하겠지만 사실 이야기거리가 많은 건 이 사진입니다.
뭔가 여기가 절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기와. 기와 만드는 기술도 과거엔 꽤나 고급기술이었지요. 삼국시대엔 아주 높으신 분들이 머무는 곳 아니면 올라갈 일도 없었고, 처음 황룡사를 만들던 진흥왕 때의 신라인들은 자체적으로 만드는 게 힘들어선지 고구려 기술이 들어간 기와를 씁니다. 마치 1980년대에 공산품에 '미국, 일본, 독일 무슨무슨 회사와 기술제휴!' 이러며 광고하던 것처럼 말이죠.
저거 무슨 무늬라고 들었는데, 하얀악마 건담옵하보다 사양이 딸리는 짐순이는 쉬이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뭐, 자쿠랑 돔이랑 겔구구 쌍판만 잘 구별하면 되지 뭐.. 퍽! 기와 단면 이런 거 많이 보긴 했는데 워낙 관심이 없었으니.. .
뭐, 조사한 흔적인데, 고고학은 안드로메다 은하 공용어로 들리는 짐순이에게 이게 뭐라 해도 알아먹을리가요.. 히잉.. 그런데 산 중턱에 그럭저럭 펼쳐진 평지라 뭔가 건물이 들어설듯 합니다. 사진 속의 선은 그냥 지도의 파란 경도와 위도선, 또는 모눈종이의 파란 선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적 조사하며 일종의 좌표 기준이 되는 거라고요.(틀렸으면 원래 무식한 女ㄴ이라며 도망갈 속셈. 데헷~!)
그래도 여기가 절같은 곳이라는 것의 마지막 흔적. 사진에선 작게 보이는데 귀찮아서(원래 이쁜 女ㄴ이 게으르다) 다가가서 찍지 않았지만 사진 정중앙에 나한상같은데 서있고, 그 앞에 작은 제단같은데 만들어졌습니다. 산에 오르던 인근 마을분들이 오며가며 치성을 드렸나 봅니다. 처음에는 상만보고 산제당인가 했네요.
뭐 고고학하시는 분들이야 유적의 성격, 실태와 유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겠지만 짐순이는 저걸 보며 왜 여기에 절이 세워지나를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는 언제 지어졌을까란 질문도 떠올렸지요. 요즘에야 좀 번듯한 절은 산에 많이 있으니 당연히 절은 산에 있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처음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교가 들어왔다고 해서, 왕이 공인을 한다고 해서 전국민이 신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처음에 절은 더시의 민가 속에 세워졌습니다. 마치 한때는 다방, 또 언젠가는 식당, 또 요즘은 편의점보다 더 많다는 소리를 듣는 서울의 교회당처럼 말이죠.(짐순이가 세어보니 100미터 반경에 교회와 성당이 7개소 이상 모인 곳도 꽤 되더군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전반의 절은 거리마다 있었습니다. 그리고 높으신 분들부터 믿었지요.
경덕왕 때 진주에 사는 욱면이라는 계집종이 주인을 따라 절에 다니다 그만 불심을 갖게 되고 마당에서 자기도 일종의 신앙활동에 참여합니다. 그걸 본 주인이 저 천한 것이 감히.. 이러면서 마구마구 일을 시키죠. 그래도 욱면은 지친 몸을 이끌고 억지로 잠을 쫓으며 따라옵니다. 그러다 어느날 하늘에서 욱면은 불당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의 소리를 듣고 들어가니 승천하여 부처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오지요. 가진 자, 높은 자만을 품던 불교가 원효나 여러 사람들의 포교, 그리고 선종이라는 종파가 뿌리를 내리며 높은 문턱을 깎아내리지요.(물론 선종이라 해서 그리 대중적이진 않지만 교종보다는..) 권력을 피해 산으로 들어가 정진에 중점을 두기도 하고요. 서서히 절은 산으로 들어갑니다.
맨 위의 사진 속에서 춘천시의 강북지역의 개활지를 보고 당시도 저리 땅이 펼쳐져 있겠거니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시기에는 평지도 숲이 많았습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넓게 땅을 이용하던 시대가 아닙니다. 점으로 이어진 사람들의 마을과 선으로 이어진 길들이 존재하던 시댑니다. 가끔 짐순이가 씹는, 고구려 땅이 넓으니 인구가 매우 많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생각은 틀린 이유지요. 마을이라고 해도 전원일기의 양촌리같은 자연촌이 아니라 사람들을 밀집시켜놓고 그 주변만을 개간해 쓰던 형태입니다. 통일신라로 들어서면서 많이 넓히긴 하지만요.
그런데 산은 얼마나 더 울창했을까요? 강원도의 밭에는 아직도 돌이 가득합니다. 꽤나 오래전에 개간해서 쓰는 농토조차도요. 사람들의 손이 미처 닿지 못하던 시절에는 어땠을까요? 오늘 올랐던 산처럼 나무들이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며 심어졌을까요? 휴양림에 가보고 이게 자연적인 숲이겠거니 상상하는 건 자유지만 그것이 그 때 모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매력포인트로 먹혀들진 않습니다. 적어도 고대 사회경제사를 사회주의 경제사학처럼 소유권 문제가 전부라고 생각하던 사람들 말고 진짜 생산과 소비라는 경제문제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말이죠.
같이간 동행인에게 물으니 아직 시대를 특정하긴 어려운데 조선시대 이전에 세워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물론 여러분들은 고고학에 무식한 짐순이가 말귀를 제대로 알아 먹었는가는 항상 의심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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