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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조신스님은 안드로이드 마누라를 꿈꾸는가..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조신스님은 안드로이드 마누라를 꿈꾸는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5. 9. 16. 04:42

일요일, 쟈브로경 해밝은 날에 뒤늦게 일어나 거실을 좀비처럼 노니는데 이불에 발은 없고(모빌아머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한참 삼국유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날 이 시간에 재미없는 이야기만 나온 것 같은데(중국경제 찬양론만 읊조리거나) 그래도 고대사 이야기하니 귀는 끌립니다. 그러나 어제 들이마신 미노프스키입자가 내부 기관을 자극하야 속청소를 하느라 잘 듣지 못하는데 순간순간 듣자니 고대사 전문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래 이어질 인용문에 나오겠지만 조신을 재정만 관리하는 승려라 결혼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 나온 이판승과 사판승의 싸움도 아니고(조선후기에 이판승과 사판승으로 분리되는데 이판승은 수도, 사판승은 재정을 담당하지요. 이것은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이판은 비구승, 사판은 대처승으로 구분됩니다. 이들의 갈등이 이판사판... 쩝) 고대에 대처가 가능한 사판승이 있었을리가요. 순간 이 방면 전문가 분에게 물어볼까 했다가 공부 안하는 거 또 뽀록날까봐 안했어요.


아시다시피 짐순이는 삼국유사 이야기를 안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학계의 지나친 삼국유사 사랑에 대한 중2병 반항이랄까.. .(적어도 옛날 할아버지들은 삼국유사보다 더 좋아한 티가 남) 물론 짐순이가 삼국유사에 어두운 면이 있었지요. 그래도 생각을 정리하는 겸 삭주성 달밝은 밤에 잠도 못자고 감기약에 취해 끄적거려봅니다.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달사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있었다. 본사에서 중 조신을 보내어 장원의 관리인으로 삼았는데, 그는 장원에 와서 태수 김흔공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다. 


요즘 개신교가 많은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후기부터 지난 세기, 아니 지지난 세기까지 그 욕을 독차지하던 것은 불교였습니다. 서을 시내에 편의점보다 더 많다는 교회 만큼은 아니었지만(요건 교파가 많고 '경제'가 교리/교학에 흡수된 개신교와의 차이) 흔하디 흔한 것이 사찰이었죠. 권력에 밀착한 교단은 물론이고 지방에 은거한 선종 조차도 권력이나 신분제와 멀리 떨어지지 않았죠. 통일신라와 고려로 이어지는 동안 사원의 부는 늘어납니다. 


조신이 속한 세달사는 개풍군, 지금의 개성 인근의 사찰입니다. 그러니까 개성 근처의 사찰에서 날리군(요건 영월로 보기도 합니다. 날라리가 많아서 날리군이 아냣!)에 방대한 토지를 경영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개성, 당시는 송악이겠군요, 하여간 그곳의 승려 조신이 사찰 소유 장원을 관리하기 위해 파견나온 겁니다. 그가 조선후기, 특히 이승만 정권 시절의 법난에서 볼 수 있는 사판승이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전의 시대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시대입니다. 물론 이과 성향이냐 문과 성향이냐는 식의 중심축은 다르겠지만(아! '잿밥이 더 좋아? 염불이 더 좋아?'가 더 적당할까요?) 당시 체제에선 그냥 승려였을 것입니다.


그가 처자식을 거느릴 수 있는 사판승으로 보인다면 그건 후대인의 착각이라는 것이죠. 일단 이판사판은 당시에 없던 제도이고, 삼국시대 이후 기록들을 봐도 타락한 승려가 몰래 여성과 운우의 정을 나누어 애를 만들었을 가능성이야 항상 존재하지만, 그게 제도로 용인된 것은 아니죠. 신윤복의 풍속화에서 승려가 여성을 에로에로하게 쳐다봤다고 그 시대 승려도 자유연애가 가능햇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죠. 마치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조카'처럼 모두 자식인줄 알지만 공식발표를 믿어주는 척하는 것처럼요. 


물론 승려나 그 비슷한 사람이 여성과 최소 사실혼에 가까운 관계를 가진 예도 있다고 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우선 요석공주와 결혼한 원효가 있고, 수도 중에 아내를 가진 광덕이 있습니다만 원효는 파계를 하고 설총을 낳았고, 광덕은 승려인 사문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21세기식으로 보자면 사실혼관계이지만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같이 수도한 사이입니다. 여기에 조신이 대처승이라 하지만 실제 그는 여인과 함께 도망을 친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장원관리 승려와 태수의 딸이 어떻게 일생토록 굶주릴까요? 조신의 신분이야 모르지만 적어도 평민과 귀족과의 금지된 야반도주도 아니고 또 애도 낳았는데 아무리 그런 시대라도 버리긴 어렵죠. 감히 천한 가야왕족놈이 왕의 조카딸을 꼬셔서 달아났는데 열받지만 애도 낳으니 참아준 어느 할아버지는 김유신이라는 손자를 얻었죠.


아주 정확한 의견이라면 현재로서는 "조신이 처자식을 거느릴 수 있는 대처승이었다는 증거가 없다"가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약간은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대처승이 존재했을 확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특히 동북아시아는 물론 대개의 불교종단은 아예 속세의 인연을 끊는 남녀 승려, 승려는 아니지만 교리에 따라 살고자하는 일반 신도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건 부처님이 인도에서 종단을 세울 때부터 세운 기본적인 종단조직 구성의 원리니까요.


마지막으로 조신의 꿈에 대한 삼국유사의 번역문을 올립니다. 어느 분 번역인지는 까먹었지만(아마 박성봉선생님판을 짐순이가 약간 손댄 것이지 싶슴돠. 기억이 안나지만..) 현실의 짐순이는 매우 회의적인 면이 강한데 어린 시절에 그걸 고착화한 게 이 이야기였죠.


조신의 꿈


옛날 서라벌이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의 장원이 명주 날리군에 있었다. 본사에서 중 조신을 보내어 장원의 관리인으로 삼았는데, 그는 장원에 와서 태수 김흔공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살게 해달라고 남몰래 기도했다. 이로부터 수 년이 지나 그녀에게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에 나가 관음보살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지쳐서 옷을 입은 채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 속에서 문득 그녀가 기쁜 얼굴로 입을 활짝 벌리고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일찍이 스님을 잠깐 뵙고 알게 되어 마음 속으로 사랑하며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이제 부부가 되고자 하여 왔사옵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40여 년을 같이 살며 다섯 자녀를 두었다. 집은 단지 네 벽뿐인데 거친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마침내 영락하여 식구들을 이끌고 사방으로 다니면서 얻어먹고 지냈다. 이렇게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헤매니 갈갈이 찢어진 옷은 몸뚱이도 가리지 못했다.


때마침 명주 해현령을 지날 때 15세 되는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으매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남은 네 식구를 데리고 그들 내외는 우곡현에 이르러 길 가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그들 부부는 늙고 병들었으며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하였다. 10세 된 딸아이가 보다 못해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마을 개에게 물려 아프다고 울며 앞에 와서 눕자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서글피 말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습니다. 한 가지 음식이라도 당신과 나누어 먹었으며, 작은 의복이나마 당신과 나누어 입으면서 함께 살아온 것이 어언 50년입니다. 그동안 정은 깊어졌고, 사랑도 굳게 얽혔으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쇠약하여 생기는 병이 날로 더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심해지니 남의 집 곁방살이나 보잘것 없는 음식조차도 빌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여기저기에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이것도 미처 돌보지 못하였는데, 어느 틈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풀잎에 이슬이요, 지란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입니다. 

이제 당신은 제가 있어 더욱 근심이 됩니다. 조용히 옛날의 기쁨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과 제가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까지 왔을까요? 뭇 새가 다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는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친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행하고 그침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따르는 것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이 이말을 듣자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데리고 장차 떠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가겠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꿈에서 깨었다. 타다 남은 등잔불은 하늘거리고 어느덧 희뿌옇게 날이 밝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었다.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하얗게 세고 망연히 세상일에 뜻이 없어졌다. 이미 괴롭게 살아감도 싫어지고, 마치 한평생의 고생을 다 겪고 난 듯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깨끗이 사라졌다. 이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도 누를 길이 없었다. 그는 돌아와 해현에 묻는 아이를 파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돌미륵이었다. 물로 씻어서 근처의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서 장원을 맡은 소임을 내놓고 사재를 기울여 정토사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 『삼국유사』 3, 탑상, 낙산사이대성 관음정취조신조



말꼬리 -------------------------------

1.

태고종에서는 이판사판이란 말을 조선 후기 이후 조화롭던 이판과 사판이 이승만의 법난 이후 어지럽게 싸우는 뜻으로 변질되었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는 이판이나 사판이나 더는 희망이 없는 막장길에 들어섰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만. 왜그런지 태고종 쪽 해석에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주관적이지만요.

2. 

오늘 경춘선에서 짐순이 옆에 앉아 계속 콜록거린 色姬는 자폭해라! 네놈 덕분에 잠잠해지던 감기가 매우 심해졌잖아!!

3.

원래는 사원경제가 포인트였으나 정작 거기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유일하게 가진 중국 당의 사원경제 책도 안읽고 어딘가에 방치했다는 사실을 깨닿고 포기!!

4.

순간 춘천의 모 천태종 사찰에서 하는 불교대학 강좌를 들을까 고민. 불교, 아니 사상사 전반에 취약한터라 배우면 깨달을까 싶어서.. 아 지 족보도 잘 몰라서 맨날 어지러운 女ㄴ이!(짐순이가 짐2를 낳고, 자쿠와 눈이 맞아 네모를 낳고, 다시 짐2는 3을 낳고.. 그런데 제스타는 손자냐 증손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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