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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광덕은 승려인가 거사인가?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광덕은 승려인가 거사인가?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5. 9. 20. 21:53


짐순이는 삼국유사따위에 모자이크를 하지 않는 시크한 女ㄴ이지..

지난 글에서 조신이라는 승려 이야기를 하면서, 적어도 고대사에서 아내를 거느린 승려는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지요. 그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여인의 분냄새라도 맡았을 사람들로 원효와 광덕을 꼽았습니다. 원효야 파계를 하고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예욉니다.(물론 사고치던 시점은 아직 승려) 이런 예를 들어 아내를 가졌을 수 있다고 하기엔 무립니다. 개가 사람을 문 것과 사람이 개를 문 것 중 무슨 사건이 대서특필 되겠습니까? 그렇게 어쩌다 사고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다수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아니겠습니까?


문제는 광덕입니다. 삼국유사에는 그를 사문沙門이라 적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문은 출가한 승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애초에 고타마 싯다르타가 불교 교단을 세울 적에 출가한 남녀 수도자를 각각 비구와 비구라 하고 출가하지 않되 교리에 맞게 살아가는 남녀 재가 신도를 각각 우바새/우바니라 부릅니다. 광덕은 남자니 비구 아니면 우바새인데 아무래도 사문이라는 단어는 비구로 여겨지게 하지요.


그러나 그와 친구 엄장은 절 근처에 살되 생활은 일반인과 같았습니다. 사찰 안에 들어가 승려로 생활한 게 아니라 이거죠. 그러면서 불도에 힘을 쏟았으니 정진하는 속세 수도자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불교도 종교이고, 엄연히 교단조직이 있습니다. 더욱이 고대로 올라갈 수록 출가 자체에 제한이 있었으니 그 교단에 속하지 않는 승려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광덕은 짚신을 삼아 팔았고(분황사던 황룡사던 거기가 거기고 어차피 서라벌 내의 가장 큰 번화가임), 엄장은 산 속에 암자를 짓고 화전경작을 합니다.


광덕은 처자를 두었으되 일상의 가족이라기 보단 같이 수도하는 동지랄까? 어쩌면 일연은, 혹은 일연이 근거로 삼았을 원전의 저자는 그 점을 주목하여 광덕과 엄장을 사문이라 불렀던 것인지는 모릅니다. 지난번 조신에 대해 적고나서 결국 어떻게 생각하심까..라고 지인에게 물어보는데 마침 광덕과 엄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문이라고 적혀있기는 한데 거사로 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네요. 거사, 그쵸.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완전히 교단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생활은 일반적인 승려들과 같이 하되 일정부분 속세와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는 이니 거사라 볼 수 있겠지요. 거사라하여도 정말 암자나 작은 절에 은거하는 경우도 있고,(뭐 이게 가장 대표적인 거사입니다만) 여항에 숨는다는 말처럼 저잣거리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일민逸民이라고 부를 수 있지요. 


시장통에서 도를 구하는 광덕이나 암자에 사는 엄장이나 일반 신도보다는 수도자에 가까우니 사문이라 하여도 무리 없지요. 하여튼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짐순이의 모노아이에 그런 기능이 있었는가?) 마치 춘천의 안개처럼 짙게 깔린 미노프스키 입자를 헤치고 뒤져봐도 아내를 거느린 스님의 존재는 찾을 수가 없군요.(물론 애인을 가진 스님은 있었을 수 있다니까요!)


애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삼국유사의 해당 기록을 옮겨봅니다. 그런데 그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사문을 직역하여 '중'이라고 적혀있네요. 아아.. 이래놓으면 정말 그 미묘한 느낌이 안산다니까~~!(직독직해만이 답은 아니라능)


광덕엄장廣德嚴莊


문무왕 대에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친하여 밤낮으로 약속하여 말하였다. “먼저 극락으로 가는 사람은 모름지기 알려야 한다.” 광덕 은 분황사의 서쪽 마을<혹은 황룡사에 서거방西去房이 있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에 은거하며 짚신을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처자를 끼고 살았고, 엄장 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불태워 힘써 경작하였다. 하루는 해 그림자가 붉은 빛을 띠고 솔그늘이 고요히 저물었는데 창밖에 소리가 났는데 “나는 이미 서쪽으로 가니 자네는 잘 살다가 빨리 나를 따라 오라”라고 알렸다. 엄장 이 문을 밀치고 나와 그것을 살펴보니 구름 밖에 천악天樂 소리가 들리고 밝은 빛이 땅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음날 그 집을 찾아가니 광덕 은 과연 죽어 있었다. 이에 그 부인과 함께 시신을 거두고 무덤을 만들었다.


일을 마치자 곧 부인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죽었으니 함께 사는 게 어떻겠는가”라고 하니 부인이 좋다고 하여 드디어 머물렀다. 밤에 장차 잘 때 통정하고자 하니 부인이 부끄러워하면서 말하였다. “법사가 정토를 구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엄장 이 놀라고 이상하여 물어 말하였다. “광덕 은 이미 하였는데 나 또한 어찌 꺼리겠는가.” 부인은 말하였다. “남편과 나는 10여 년을 함께 살았지만 아직 하룻밤도 같은 침상에서 자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정하게 닿아서 더럽혔겠습니까. 다만 매일 밤 단정한 몸으로 바르게 앉아 한 소리로 아미타불만 염불하였고, 혹은 16관을 만들고 관이 이미 무르익어 밝은 달이 문으로 들어오면 이때 그 빛 위에 올라 그 위에서 가부좌를 하였습니다.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비록 서방으로 가지 않고자 하더라도 어디로 가겠습니까. 무릇 천리를 가는 자는 한 걸음으로 가히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지금법사의 관은 동쪽으로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쪽은 곧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엄장 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물러나왔다.


곧 원효법사元曉法師가 거처하는 곳으로 나아가 진요津要를 간절히 구하였다. 원효는 삽관법鍤觀法을 만들어 그를 가르쳤다. 엄장 은 이에 몸을 깨끗이 하고 잘못을 뉘우쳤고 한뜻으로 관을 닦았으니 또한 서방정토에 오를 수 있었다. 삽관鍤觀은 원효법사 의 본전과 ≪해동승전 ≫ 속에 있다.


그 부인은 곧 분황사의 종이니 대개 십구응신十九應身의 하나였다. 광덕에게는 일찍이 노래가 있었는데 이르길 “달이시여, 이제 서방정토까지 가서 무량수불 앞에 알리어 여쭈옵소서.<우리말로 보언報言을 말한다.> 다짐 깊은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 모아서 왕생을 원합니다, 왕생을 바랍니다 하며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옵소서. 아아, 이 몸을 버려두고 마흔 여덟 가지 큰 소원을 이루실까 저어합니다.”


- 삼국유사, 제7 감통, 광덕엄장조


말꼬리 --------------------

1.

부, 부식옵하! 아냐! 아냐! 짐순이는 일연스님이랑 바람난 거 아니라니까! 

2. 

정말 삼국사기 읽은지 꽤나 오래되었구나.

3. 

광덕의 부인은 사실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데, 사실 그게 베르단디였을지 우리가 우찌압니까!


뭐, 이 그림처럼 엔딩은 좋게 끝났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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