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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구삼국사를 비롯한 고대~고려 전기 사관제도에 대한 잡상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구삼국사를 비롯한 고대~고려 전기 사관제도에 대한 잡상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22. 3. 9. 02:26

고려시대의 문서관리 자료를 보다보니, 고대의 문서관리가 몇몇 선생님들 생각처럼 마구 소급해서 ~~이럴 것이다~~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려 중기에도 중국과 통하는 공문서를 쓰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고, 공민왕 때도 홍건적이 쳐들어오니까 자료들을 땅에 묻어 보관했는데, 물러나고 다시 찾으려니 귀찮다고 폐기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그나마 한 명이 난리쳐서 수습 안했으면 상당수의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라 하니, 그 전에는 그 기록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투철했겠냐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유지기가 "사통"을 쓰던 시절, 빡쳐버린 현실이 한반도에서는 고려 중후기에 나타난달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국가가 처음 사관이라는 관청을 두어, 에전처럼 외주 주지 않고 직접 전생산공정을 관리하기 시작하며 여러 가지 불협화음이 터지는 과정을 보고 이래서는 안된다며 유지기가 쓴 게 사통이다. 그마저도 역사서 편찬의 전통이 있고, 조선으로 말하자면 사초와 같은 기거주를 꾸준히 작성하고, 그것을 다음 왕조까지 이어 관리하던 남북조 시절 경험이 쌓여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사실 조선만 하더라도 그렇게 신경써서 실록을 관리했는데(이 정도면 편집증적이다) 완질로 남기기가 그리 어려웠다. 고려 7대실록처럼 임란에 조선 전기 실록도 날아갈 뻔 했고, 후기 실록도 그렇게 난리쳐서 또 분산보관 안했으면 적어도 남한 또는 북한 하나 쯤은 고대사나 고려사 정도의 자료를 놓고 연구할 뻔 했다.(동경대로 가져간 건 대지진에 일부만 남고, 완질 하나는 부카니스탄이 서울 점령해서 가져갔다. 만약 한 질만 있었으면 아예 없어졌거나, 한쪽은 상대방 논문의 재인용으로 연구해야 했을 거다)

시스템의 제원만 보고 아마 ~~이럴 것이다~~라고 소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그것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움직인다. 하다못해 고려 후기 안향 이전까지는 한반도에서 성리학을 몰랐을까? 실제로는 쟤들 이런 소릴 지낀다더라~ 정도는 실시간으로 들어왔다.(최충의 문헌공도의 각 반 이름이 북송오자를 알지 못하면 쓰지 못하는 것들이다) 당의 장안에서 백낙천이 시를 하나 발표하면 한 부 복사떠서 곧바로 경주로 날려보내던 게 통일신라 때 일이다. 고려 역시 그랬다. 고려가 그것을 내재화하는데 시간이 걸린 일이지. 듕궉도 당 후반부터 시작된 사변이 송대 와서야 완성을 보는데, 그게 바로 이식된다는 것 자체가 무리에 가까운 생각이다. 자치통감의 경우 30년이 걸려 들어왔다고 하는데 물리적으로 그렇게 오래 걸렸다기 보단 그것이 새로운 역사학의 조류라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시간이라고 본다. 

어떤 분들께 이런 이야기를 하면 거의 분노로 대응하는데(나으 고려에게 목욕값을 줬어!!) 사실 상당수의 분야에서 제대로 내재화를 하는 것은 조선시대와서다. 물론 고려도 나름 시행착오를 거치며 기반을 닦아둔 건데, 기반이 아니라 완성이라고 보지 않으면 무엄하다는 건 사실 반역사적이다. 그러니까 듕궉 자료를 보고 여기서도 이랬을꼬얌~하는 태도는 사실 굉장히 위험하다는 거.(나 한문 잘혀유, 현대 중국어 잘혀유~ 과시하는 게 아니라면) 

기존 으르신들의 생각보다 구삼국사가 엉망일 가능성도 이젠 염두에 두어야 할 때다. "사통" 오시편에 실린 것보다 더 많은 문제를 가졌을 수도 있으며, 김부식이 구"삼국사"를 아예 이름으로 거론하지도 않고, 문제가 많아 다시 써야 한다고 한 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진심을 담은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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