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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고려시대 사학사를 다시 써야하나.. 본문

삼국사기학 개론

고려시대 사학사를 다시 써야하나..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24. 4. 23. 19:25

아까 정구복 으르신 책을 읽다가 뭔가 찾아봐야해서 "시민의 한국사"를 폈다. 

그런데 후고려(이 왕조의 패악질은 4~5세기 이후 고구마가 국호를 고려로 글자를 줄였음을 감추고, 그 이름을 오롯이 자기 이름으로 한 것에 있다. 그래서 돌라 안둏아해)의 문화 부분에서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시민의 한국사 1권, 337쪽



우리 부식옵하도 아직 먹도 안마른 따끈따근한 "자치통감"을 구해다 썼고, 일본 궁내성 도서관에 숙종(그래도 후대 왕조의 세조와 달리 조카를 담그진 않았다!)의 장서인이 찍힌 "통전"이 있긴하다. 소동파가 책수출금지같은 소릴 지끼긴 했는데 실제론 고려에서 사라진 책을 구하는 중이었다.(사실 소동파가 혐한한 건 "글안"을 물리치고 이 후고려 사신놈들이 대패한 송나라 놈들 약올려서란 얘기도 있다)

한서, 진서, 당서(아마 구당서로 보임. 신당서는 송에서도 판각하기 전)를 "교감" 판각했다는 이야기다.

만약 이게 입증된다면, 한국사학사는 다시 써야 할 판이다. 저 사서들도 송에서 막 판각하기 시작한 시점이고, 한~오대에 걸쳐 만들어진 사서는 대부분 필사하다 생긴 오류가 많아, 그에 대한 송의 교감은 명청대 학자들에게도 인정받은 수준이다.(청대 학자들이 명나라 때 나온 판본보다 송의 판본에 열광한 건 다 이유가 있다) 그런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때까지 나온 여러 판본을 세밀하게 연구하여 오탈자 및 주석이 원문으로 둔갑하였거나 해당 판본의 소유자가 메모한 것을 다음 필사자가 원문으로 오인하여 집어넣은 것들을 바로잡았다는 말이다. 비록 진삼국사기표에 이놈의 학자들이 자국사보다 듕궉사에 해박해서 문제란 말이 나오지만 교감에 이르다면 그런 정도가 아닌데?

마침 북송초에 당 이전의 정사는 물론이고 당 초에 정리한 위진남북조 정사류와 구당서까지 국가사업으로 판각한다. 그중에서 한서와 후한서는 10년 안짝으로 계속 개정판을 내며 재판각해서 내놓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냐면 원래 후한서는 지가 없다. 범엽이 그걸 만들기 전에 역적혐의를 받았고, 난 틀렸으니까 대신 해달라고 부탁한 친구가 먼저 죽었다. 나중에 양에서 사마표의 지를 붙여서 완본으로 만드는데, 이걸 최종적으로 결합해서 현재 우리가 아는 후한서 편제로 내놓은 게 북송 때다.

그걸 곧바로 사왔다는 건 말이 된다. 후고려, 후조선의 사신들의 임무중 하나가 인쇄소에서 막 나온 신간 업어오기다.(개인적 부탁도 있었지만, 공무가 더 중요 임무) 심지어는 청이 유출금지한 걸 어떻게든 몰래 사왔는데, 생각을 바꾼 청이 한 질 건네주니 처음 보는 척, 표정관리 하느라 애먹었다는 사례도 있다.

그런데 "교감"을 하고 판각까지 했다라. 연구의 깊이는 물론 그 돈먹는 하마인 판각사업을 벌일 정도로 수요가 막대하다는 건데, 이거 천조국과 불곰국이 유인우주선 처음 띄우고 있을 때,(유리 가가린! 존 글렌!) 대한민국도 닝겐 탑승 가능한 발사체 시험발사 준비하고 있었단 얘기다. 사학사뿐만 아니라 중세 문화사, 기술사를 다시 써야하는 급의 내용이다. 현재 한국학계의 고려시대 발전 단계에 대한 인식을 재편해야 한다. 적어도 중세의학사랑은 완전 충돌한다. 거긴 오렌지에 주사바늘 꽃는 연습하는데, 여긴 로봇 수술 10000회 달성 축하 파티하는 격차다.

그런데 참고문헌같은 게 있으면 출처 추적이라도 할텐데, 이 책은 집필자의 분담 표시도 없다. 정조가 "송사"가 부실하다고 제2의 중화인 우리가 해야해~!라고 한 적은 있지만 그보다 수백년 앞서 오버테크놀러지를 선보인 거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이 교감이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더 찐득한 늪이다. 뭐 유라시아대륙을 전부 가졌다는 얘기도 버젓이 팔리는 세상인데, 교감, 판각정도야 가벼운 거 아닌가란 말을 하면, 니 말이 옳습니다... 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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