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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과연 백제에도 마약이???? 본문

한국고대사이야기/사건과 진실

과연 백제에도 마약이????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10. 4. 13. 09:53


오늘 아침에 매우 흥미로운 뉴스가 히나 나왔습니다.
백제시대의 마약조달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제목의 뉴스죠.
매일 왕과 귀족들의 정쟁,(사실 이것도 당시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겠다는 방향의 논쟁입니다)
쉬지 않고 치고박는 전쟁 얘기나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겐 솔깃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1년을, 평생을 살아갔는지에 대한 자료는 희소한 상황이니 말이죠.

과연 백제에도 마약이 있었는가..
마약이 결코 좋은 물건은 아니겠으나 그 시대에도 있었는가는 흥미로운 것입니다.
그럼 한식산/오석산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을 먹었는가에 대해
기사에 실리지 않은 것들을 부연하기로 하지요.

한식산이 왜 사용되었는가,
기사에서는 단순히 도교의 성행에 따라 유행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만
중국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나면 더 명확해집니다.
삼국지의 시대를 끝내고 통일하자마자 진나라는 내부 분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순식간에 멸망하는데
많은 한인들이 북방이민족을 피해 강남으로 내려갑니다.
건조한 화북과는 달리 강남은 습한 날씨지요.
게다가 강남이 화북의 경제력을 넘어선 것은 당나라 말기,
번성했던 화북에 비해 강남은 살기 막막한 상태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토인비는 진의 멸망과 남천을 중국 고대 문명이 끝난 것으로 해석하는데
그야말로 그 사람들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一日雨, 一日醉, 一日病
하루는 비가 와서 그 다음날 취했더니, 다다음날 앓아 누웠어..

중국인이 최고라는 자존심의 붕괴, 삶의 터전을 잃었다는 상실감,
세상은 아름답기만 한 줄 알았더니 사실은 아귀지옥이었다는 현실감,
이런 것들이 이 시대 이후의 정신적 흐름을 좌우하게 됩니다.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황로사상과 오두미교나 태평도가 발전한 도교가
중요한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잡게 되지요.
이들이 추구하는 신선 세계로의 전환,
그것을 이루어준다고 하는 비약이 바로 한식산이 되겠습니다.
다섯가지 중금속을 버무렸으니 (역설적으로) 효과는 끝내줍니다.
몸이 썩어들어가고 정신착란이 일어나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정신에서 신선의 그것으로 '기변'함에 따라 생기는 후유증,
아니 변화의 확실한 증거로 자리매김합니다.

죽림 7현도, 왕희지의 가족들도 이 한식산의 애용자로
한식산의 부작용으로 인해 등이 썩어가며 죽거나 숨어 술을 마시거나 했답니다.
부모가 죽었는데도 술을 마시고 울지 않았다 함은 
그들이 불효덩어리도 아니고, 부모가 폐륜의 극치도 아니었으며
순전히 세상으로부터 초탈의 의지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약을 먹고 감정이 복받치면 피를 토하고 위독한 상황에 이르렀다 합니다.
(실제로 7현 중에 누가 결국 울었는데 피를 한 사발 토했다 합니다)

또한 육체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파탄를 일으켜
위진남북조 군주들의 괴상한 행동 뒤에는 이 약재가 있으며
실제로 한식산을 복용한 후 비틀거리는 모습이 유행이었다고 하지요.
그렇게 위험한 약재임에도 복용해야 했던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극심한 정신적 고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 그럼 다시 백제로 돌아가봅시다.
물론 한수유역을 상실했다가 되찾고 다시 상실하긴 했으나
당시 백제 귀족들의 태반은 공주와 부여에 기반을 둔 세력이었습니다.
한성시대에는 해씨나 진씨, 목씨가 세력을 떨쳤지만
광개토왕, 장수왕의 공격으로 많은 수가 잡혀가서
웅진,사비시대에는 토착의 사씨, 연씨들에게 밀려 귀족의 말석으로 밀려납니다.
그렇다면 위진남북조 강남귀족들과 상황이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교의 유행을 들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후반부에 도교는 활발하게 전파됩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의 변화상, 도교 때문에 못살겠다고 절을 옮긴 보덕 스님,
백제에도 산수문전이나 금동향로에 보이는 도교적 요소가 그 증거지요.
특히 백제는 도교적 영향이 더 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산동항로와 가깝게 연결되었던 데다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던 면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사택지적비같은 금석문이 나올 수있었겠지요.

사택지적비 탁본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그 종교와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이상합니다.
지금까지 도교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 선에서 그쳤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남습니다. 왜 한식산을 먹었느냐..
기사에서도 나오듯 동시대 중국인들과 공감하기 위해?
이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삼국사기를 펼쳐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다들 너무 진부하다고 여기는 정쟁과 전쟁기사에 그 해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무수한 사건들이 피.로.감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택지적비의 화려함에는 한식산을 먹어서라도 잊고 싶었던,
떨쳐내고 싶었던 것이 숨어있지는 않을까요? 

※ 해답을 주지 않고 이렇게 질문으로 끝내놓은 것은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이거죠.
※ 포스팅 중에 실수가 생겨 지우고 다시 올립니다. 다음뷰 화면이 안뜨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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