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연개소문은 과연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한 영웅인 것인가? 본문
1. 7세기 후반 고구려사의 아이콘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7세기 후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절대 빠질 수 없는 일이다.
관심을 쏟고 있는 6세기에 비해 사료도 많고(문헌기록과 묘지명..)
사건도 별별 것이 다 일어나고 있으나
그를 이야기 하지 않고 7세기 후반-멸망기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근 100년 가량 활활 타올랐던 전시상태의 결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아예 연개소문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기나 하나
만약 그런 연구자가 있다면 용자거나 바보거나.. .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일부에서는 그를 매우 남자답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영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좀 신중하게 접근하는 쪽이다.
그의 집권이 고구려 귀족사회의 원심분리적 이탈을 가속시켰다고 보기도 하고 1
신라를 친당외교로 몰입하게 한 외교적 실수를 범해
고구려의 멸망에 나름 기여하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2
역사 연구자의 한참 말석에 있는 입장에서 위 의견들에 동의하는 편인데
여기에 한 두가지를 더 첨언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우선은 그가 활약했던 시대 배경을 먼저 이야기 해보자.
2. 642년 이전의 고구려 상황
7세기 고구려의 역사 거의 전 기간은 중국과 대치상태(중간의 화평모드 포함)에 처해있는데
일반적으로 589년 수의 중국 통일로부터 비롯된 상황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국면은 550년대 중국의 북동부를 장악한 북제와 관계가 악화되는 선에서 시작한다.
요서일대의 영유권을 두고 돌궐과 북제, 고구려의 신경전이 가속되었으며
북위말~북제.북주의 분열기에 고구려로 피난을 간 중국인들의 송환문제로
북제와 고구려의 관계는 북제 문선제가 무력시위를 하고
북제의 사신이 협박을 가하는 상황에 이른다.
물론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고구려는 초 긴장상태에 돌입한다. 3
일본 기록에까지 남을 정도로 화끈한 내부 분열상을 보여주다가
평원왕 대에 이르러 정쟁을 중단하는 상황에 이르고
신라와 백제가 한강유역을 점거하는데도 50년 가까이 대응을 포기하는 것에는
국제정세가 고구려에게 그다지 유리하지 않았던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이어 수의 등장과 이은 무력충돌을 거치며
이전투구 하던 정체세력들이 케잌 나눠먹기의 기술에 눈을 떠서 정치적 타협의 길을 모색하는 것도
대외적 위기에 살아남기 위한 나름 현명한 방책이었다.
612년의 대승을 거둔 것도 단순한 군사적 승리라는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 아니라
거의 가용가능한 남성인구보다 더 많았을 병력이 침입했다는 사실에
고구려가 받았을 유형과 무형의 충격을 이해해야 한다. 4
연개소문이 태어나기 전 이야기에 이리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그가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나라가 어떤 상황이었고
그가 어떤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어야 했던가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다.
642년의 고구려는 100년 가까이 이어진 군사적 긴장상태,
2~30년 전 총력전 수준의 국력소모를 겪은 상태로 힘겨워 하는 상태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3. 연개소문의 대당정책, 그 이면..
한참 유행하던 사극에서 말하기도 하고 일부 연구자들이 말하듯 대당강경파였던가.
화평모드로 일관한 영류왕은 아주 나약해서 강경파의 눈으로 보면
제거 했어야 할 대상인가.
그의 시신이 토막이 되어 도랑에 파묻혀 버려져야 할 만큼 미움의 대상이었어야 했는가?
최소한 642년에 연개소문은 온건파라고 보기는 애매한 상황이긴 하나
그가 극렬히 당에 대항해 전쟁을 벌이자고 하였는가에 대해선 의문이다.
연개소문의 정변을 빌미로 당이 강경하게 몰아 붙이는 와중에도
화해의 표시는 했다.
정권을 잡자 곧바로 도교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고
당이 도사들을 보내자 절을 빼앗아 도관으로 삼았다.
물론 그 이전부터 도교 흔적이 나타나니 이 때 비로소 도교가 들어온 것은 아니다.
국가에서 전폭적으로 밀어주기로 하였다는 뜻이다.
이게 왜 주목되어야 하나면 당시 당 황실은 선비족 출신인 것을 가리고
노자가 황실의 선조라고 주장하며 도교를 밀어주던 판국이라
내심 당과는 크게 다투지 않고 친하게 지내자는 의사표시를 한 것이다.
또한 644년 사신을 파견하여 백금을 바치고 숙위외교를 벌였으나
당에서 전쟁하기를 결심한 상태여서 실패로 끝났다.
645년의 전쟁이 종료된 시점에서 이듬해에 사신을 보냈다.
이는 당시 최고 지도자였던 연개소문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그는 무작정 당과의 대결을 일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 안시성싸움의 와중에서 15만의 대군을 동원하는 동시에
돌궐의 일종인 설연타를 움직여 당의 퇴로를 끊으려 한 점을 볼 때
국제정세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보였던 것이다.
4. 강대국과 비강대국의 차이
이거 욕먹을 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 해야겠다.
고구려를 동북아의 강국이라고 부르고들 있지만
고구려가 당시 중국과 비교해서 강대국인가..라는 명제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당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에는 더더더더더더욱 동의하지 않는다)
강대국의 기본 요건은 외교에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이웃의 도움 없이도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있다는
전통적인 설명에 귀를 기울이자면
고구려와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는 전쟁을 결정할 위치에 서있던 것은 아니다.
물론 당과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면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전쟁을 해야겠다는 것은 당의 입장이었다.
당이 고구려를 몰아간 것이다.
요즘 사회 용어로 치자면 당이 갑이고 고구려가 을이다.
설령 고구려가 갑의 권리를 주장할 수도,
수나라를 향해 영양왕이 선제공격을 가한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사회생활을 해보신 분들이라면 을이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지 아실 것이다.
무턱대고 굽혀야 그만이란 건 아니다.
아무리 '상대적' 소국이라고 무조건 자존을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폼생폼사로 일관하다 혼자 죽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100년 가까이 초 긴장상태로 지내고
수십년을 전쟁 중에 살아야 했던 사회가 과연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 지도 생각해야 한다.
고구려인들이 전쟁을 하면서 항복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는데
645년의 전쟁에서부터 유독 많아진다.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백암성의 성주를 비롯해서
꽤 많은 이들이 당에 투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떤 연구자는 이를 연개소문이 귀족 타협의 결과를 파괴해서 그렇다고도 보지만
개인적으로 전쟁피로증에 무기력한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일부에선 전쟁분위기를 통해 정권을 다지려고 한다고도 이야기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문제다.
고구려 사회가 전쟁을 얼마나 더 견뎌낼 수 있었을까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수와 안시성싸움의 대승을 이야기 하지만
레판토 해전에서 대패한 오스만 투르크의 재상이 승리한 베네치아 대사에게 한 말이 있다.
우리는 비록 졌으나 수염이 불탄 것이고 당신들은 이겼으나 팔이 잘렸다.
수염은 다시 돋아나지만 팔은 다시 나오지 않는다.
군사적 승리에 눈이 멀어 사회기반의 문제를 등한히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베네치아는 외교는 칼날을 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천년은 버틸 수 있었다.
당과 고구려의 경제력과 물적, 인적자원의 회복력에 대한 구체적인 수치는 없지만
적어도 당당한 모습을 후세에 남기고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점 하나를 남기기 위해 전쟁을 선택할 환경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5. 연개소문은 정말 민족자주의 화신인가?
지난 주에 수업을 하면서 연개소문을 김정일에 빗대어 강하게 비판했었다.
지도자 혼자만의 폼생폼사로 국민들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만약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그런 행동을 할 경우에도
민족자주 운운하며 환영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점에서 연개소문을 민족자주의 화신으로 숭상하는 사람들이
나치들과 다를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말 그러한 희생을 감수할 자신이라도 있는 것일까?
몰론 이 글을 준비하면서 무작정 그를 비판하기도 어려움이 있었다.
1. 적어도 연개소문은 전쟁만이 살 길이라고 한 적이 없다.
2. 전쟁을 강하게 밀어붙인 것은 당이다.
이 점은 그의 손에 쥐어진 카드가 그렇게 많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설령 양보를 했더라도 당태종과 당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은 전쟁을 원하였다.
그러니 당과의 전쟁을 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다.
642년의 정변이 전쟁도발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지만
현존하는 기록에서는 그가 대당강경책을 국시로 하겠다는 식의 발언을 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도 피해자다.
하지만 그의 문제는 국제사회의 변화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되
그걸 제대로 활용할 생각이 없었다는 것일 것이다.
당이 고구려하고만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었고
요동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연개소문의 실각을 주장하는 터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외교적으로 시간벌기를 할 수도 있었다.
가끔은 믿지는 것이 후일 이자로 돌아오기도 한다.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당의 압박은 분명 내정간섭으로
고구려가 쉬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겠지만(그래도 연개소문의 실각보다는 실천가능한 것이었다)
적어도 적을 양쪽에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정변 직후 김춘추의 방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어수선해서라고 봐주더라도
이후 정권이 안정된 상황에서 신라를 방치한 것은 분명한 외교적 실수다.
국가는 패션쇼를 하는 것이 아니다.
양아치의 근성자랑을 위한 무대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그 성패의 결과로 지도자의 집권에 대한 결산을 할 수는 있어도
사실을 왜곡해 가며 엉뚱한 가치판단의 자료로 쓸 수는 없다.
물론 민족감정이란 것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제쳐두고라도 말이다.
그의 대당정책에 있어 무엇보다 어느 특별한 이념이 아니라
정권의 생존이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임기환, '6․7세기 고구려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고대사연구" 5, 1992. [본문으로]
- 노태돈, '연개소문론', "한국사시민강좌" 31, 2002. [본문으로]
- 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 이성제, "고구려 서방정책연구", 국학자료원, 2005. 6세기 상황에 대해서는 위 책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 간혹, 고구려 인구가 1천만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당시의 농업생산력, 농지 개간정도, 위생과 의료문제, 해당사회가 견딜 수 있는 인구밀도(농업지역과 반농반목, 유목지역), 인구성장 속도 등, 이런 문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쥐풀뜯는 소리라 하겠다. 이러한 충격의 실례는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공을 들 수 있다. 인구 10만을 겨우 넘기는 피렌체에 10만 대군이 쳐들어온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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