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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뭐, 선화공주가 아니면 어때요.. 본문
문제의 사리봉안기, 하얀 밑줄이 문제의 대목,
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 백제 왕후는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이다.
출처 : 09년 1월 19일자 문화재청 보도자료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사리기의 발견으로 좀 뒤숭숭하더니
급기야 이런 신문기사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사리기의 출토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나니
당황스럽기보다는 통설과 다른 논지들이 떠오르더군요.
많은 학자들이 무왕설에 지지를 보냈지만 뭔가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서동요의 주인공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아니라 신라인이라는
황패강 선생님의 논문 서동요연구(신라문화 3,4, 1987)도 있고,
서동의 정체는 동성왕이었다는
두계 이병도의 논문(서동설화에 대한 신고찰, 역사학보 1)도
새롭게 조명받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뭐, 진평왕의 공주를 업어간 서동은 신라인이고
또 동성왕이 신라의 왕족 여인과 결혼하기도하였으니
전승과정에서 각기 다른 두 사실이 조합되어
역사기록에 한가지 사실로 남은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기사 내용대로 두 명 이상의 여인이 왕비였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놈의 고구려 내분설의 발단이 된 안원왕도 3명의 왕비를 두었다고하죠)
액면 그대로 사리기의 가능성을 믿어볼 필요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삼국의 왕들이 의무적으로 여러 명의 왕비를 둔 것도 아니니까요.
삼국유사의 서동설화가 옳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대에 쓰여진 기록이 왕비는 사택씨라 말하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단정할 수 없다는 노중국 선생님 의견에 동의를 하며
좀더 추이도 살펴보고 정확한 판독문도 나와야 하겠지요.
다만 지나치게 익산의 논리를 적용하며 발굴된 유물의 목소리에
무조건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워낙 지방자치제 이후, 지역 현창사업이 활발히 벌어지면서
무비판적인 역사만들기가 횡행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 개인 블로그에 썼던 옛글(090121)인데 이곳으로 옮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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