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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역사에 공소시효가 있을까? 본문

역사이야기/역사잡설

역사에 공소시효가 있을까?

짐순 폰 데그레챠프 2022. 1. 22. 21:52

한번 상상해보자.

1970년대 효창공원, 혹은 1980년대에 독립기념관 앞에서 일본 총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과거에 대해 사죄하는 장면을. 천황은 직접 오지 못하더라도 통석의 념같은 두루뭉실한 단어 대신 좀 더 구체적으로 한국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는 장면을. 누가 총리였던 간에 그 장면은 브란트의 사과 만큼이나 울림이 컸을 것이다. 적어도 몇몇 빌어먹을, 얼어죽을 이들이 말하는 과거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표현은 지금보다 더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중국에 대해선 진지하게 사과를 한 일본이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도 않고, 그런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서 참의원과 중의원에서 약간이나마 언급되는 것이 전부이다. 이것을 가지고 일본은 역사적 과오에 대해 철저히 사과하는 모범적인 국가라 할 수 있을까? 그 나라는 역사청산이 잘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제대로 사과를 받은 한국인이 그런 말을 할 때, 동남아 사람들이 거기에 찬동할 수 있을까?

바로 독일의 이야기다. 1970년 바르샤바의 유대인 학살관련 기념비 앞에서 총리였던 브란트가 무릎을 꿇었다. 전후 독일 정부가 꾸준하게 나치 청산의 의지를 가지고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는 것과 함께 독일에 대한 유럽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한국에서 일본의 역사에 대한 태도를 언급할 때 언급되는 독일의 모습이다. 무릎을 꿇는 것 자체가 극히 드문 문화권에서 이런 행위는 매우 극적으로 다가왔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브란트의 사과

그러나 그 사과는 유럽에 향한 것이었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사과는 21세기, 그것도 두번째 10년기인 2015년에야 시작되었다. 독일의 역사적 과오 인정과 재발방지에 대한 노력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크게 놓치는 것이다. 식민지는 식민지니까 안하고 버티다가 매우 뒤늦게야 인정하는 것을 어디까지 긍정적으로 봐야할까? 물론 이웃 섬나라의 역사적 태도나 오로지 나찌만 나쁘다는 전세계구급 깡패 섬나라(그들에게 침략당하지 않은 나라, 지역을 헤아리는 것이 더 빠른)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라는 평가를 할 수 있으나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기는 곤란하단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표현인 '진정성이 없다'고나 해야할까?

또 하나의 우수사례(?)로 꼽하는 프랑스의 전후청산을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공화국 프랑스 건국이래부터 내려온 좌우갈등 속 반대편 숙청에 가까웠고, 그리고 약한 이들에게 더 가혹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아니 반도국가에선 병자호란 때 했던 환향녀짓을 20세기에 했다. 우웩) 나는 레지스탕스였노라 하며 부역자 색출에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이후의 참여자라는 건 거기나 여기나 똑같은 인간이란 감정밖에 들지 않게 한다.(그쪽 사람들이 역사적 맥락 다 무시하고 입바른 소리를 할 때마다 경멸이 샘솟듯하는 건 짐순이가 극도의 혐오주의자여선가)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독일의 나미비아 학살은 지탄을 받고 있으며 프랑스의 정적 숙청에 가까운 청산이 알려지고 있다. 나찌와 공산당의 장막 뒤에 숨어 홍차나 마시며 착한척 하는 어느 섬나라는 급기야 외무장관이 지금 현재 국제 분쟁의 팔할은 우리 탓이라고 실토하게 만들었다. 아직은 이지적이고 우아하고 진보적인 유럽~뽕에 빠진 사람들이 많지만 그 역사의 과거 악행은 완전히 가릴 수 없다. 

한때 한국에서 한국전 당시 양민학살은 금기어였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참혹했던 과거도 철저하게 증거를 인멸한 부분을 제외하곤 밝혀졌거나 진행 중에 있다. 그 모든 사람들의 귀와 눈을 가리지 않는 한, 아니 모두 죽여 입을 막지 않는 한 그것은 감출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서류야 어떻게든 태우면 그만이지만 사실 자체는 감출 수가 없다. 그게 누구였는지는 몰라도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다 밝혀지게 되어 있고, 그 사건을 일으킨 자는 어떻게 되었던 간에, 얼마의 시간이 걸리던 간에 드러나 비판을 받게 되어 있다. 법으로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정해져있더라도(물론 사안이 중대하면 시효가 소멸되지 않는 죄목도 있다) 역사는 인류의 첫발자국 시기에 일어났던 일도 집요하게 따지고 든다. 설령 피해자가 죽어서 더는 피해호소를 하지 않더라도.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란 말은 역사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갔으니 덮자고 하면 이승만이 죽었으니 4.3과 각종 양민학살, 전두환이 죽었으니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을 더는 이야기 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 아니 이미 나라도 되찾은 게 좀 있으면 100년이 되어가니 그 전에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 송병준의 행위는 다 묻고 가야하는가?

말꼬리 ------------------------

1. 천황이란 표현에 대해 광광거리는 이들이 많은데, 그것은 가치평가를 넘어 역사용어이다. 대한민국 정부의 정식 호칭도 천황이다. 일왕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천황에 대해 광분하는 사람들이 한국 역사의 군주들을 황제 만들지 못해 안달난 거 보면 기분이 뿅뿅하다. 무슨 중국 황제는 전부 영락제인가?

2. '통석의 념'이란 표현은 사실 그쪽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과/유감표시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말도 다르고 정서도 달라 전혀 씨알도 안먹힌 것. 물론 사과는 듣는 사람에 맞게 해야하는 것이 맞다.

3. 2010년대까지 이스라엘은 독일로부터 무기구입시 가격을 낮추거나 덤으로 삥뜯는 치트키를 가지고 있었다. '홀ㄹ~'란 구절이 나오자마자 계약서에 사인이 쓰여지는 기적이었는데 10년대 중반에 군함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려 하자 드디어 독일이 거부하였다.

4. 역사책이랍시고 끄적거리는 닝겐이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의 비윤리적 사건에 대해 관련자가 죽었으니 다 지난 일이라고 한다. 본인이 관련된 사건의 무고한 피해자는 아직 살아 있으니 이건 까도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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