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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올 초에 공산성에 갔을 적에 공산성 내 공북루쪽의 성안마을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백제의 갑옷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갑옷은 가죽 찰갑이며 옻칠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최고급인 제품이지요. 저수시설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발굴된 것을 보니 습기 덕분에 명문같은 것이 잘도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가죽부분은 사라졌고, 그 위를 두껍게 덮어쓴 옷칠 부분만 남았습니다. 갑옷에서는 아래와 같은 명문이 있습니다.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정관 19년이라는 연대입니다.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로 19년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645년입니다. 이 갑옷이 언제쯤 만들어졌느냐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적어도 이 것이 누..
무언가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침받이를 해야할 정도로 질질 흘리죠. 제작년에 오사카의 중고서점에서 3일만에 읽는 일본사인가 하는 책을 샀는데 거기에 헤이안시대의 신분구조를 다룬 표 하나 때문에 일본글을 모르는데도 샀습니다. (귀국해서 그 책 번역본이 오래전에 나온 걸 알고 또 샀죠..) 신분제는 유달리 도표가 효과적인 장르(?)입니다. 각종 신분 규제라던가, 상승제한선이라던가, 각 신분별 인구분포라던가, 소유가능한 재산이라거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 하나가, 표 하나가 더 쉽게 들어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나온 책에서 기가 막힌 그림 하나를 발견했죠. 대교 소빅스에서 나온 "우리문화탐험"의 17권 '선사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신분제도'의 한 장입니다. 사실 어린이 역사책이..
http://media.daum.net/digital/view.html?cateid=1050&newsid=20110427160031167&p=akn 미야자키 이찌사다의 "옹정제"의 말미 역사 후기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미야자키와 일군의 연구자들이 모여 옹정제가 남긴 방대한 문서들을 읽고 정리하는 기나긴 시간. 누군가 이거 지겨운 거라고 투덜거렸더니 어느 한 사람이 그랬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학문이다" 그냥 읽어보면 고작 이거 말할라고 그 난리를 피웠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학문이 반드시 아주 대단하고 신기한 것만 다루고자 한다면 그건 이미 항문이 된 지 오래된 후의 일일 것이다. 틀렸더라도 그게 왜 틀린 것인지, 맞아도 왜 그게 맞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학문이다. 이 기사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삼..
천무천황의 손자이자 고시황자의 아들인 장옥왕(나가야왕, 684?~729)은 어느 날 자신의 저택에서 신라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한 수 읊습니다. 높은 가을 하늘에는 멀리 석양이 비치고 먼 봉우리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다. 금란과 같은 굳고 친밀한 교류를 사랑함이니 청풍명월의 자리에서 피로한 줄도 모른다. 계수나무 행기로운 산에 머무는 석양빛이 발하고 국화 향기로운 포구에는 낮게 펼쳐진 저녁놀이 선명하다. 일본과 신라 사이가 푸른 물결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 말게나 언제까지나 연석에서 무르익은 사념은 시로 풀어 버리세. - 사호의 저택에서 신라손님을 위해 연회를 열다. 다른 시의 주를 보면 이 시는 726년의 가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과의 교류에서 통일 이후 공식적인 관계가 단절되는 77..
어느 조선시대사 분이 그럽디다. 10년마다 여인네들 옷 매무새가 달라진다고.. 유방의 노출의 폭이나 치마길이 등에 변화가 있다는군요. 끽해야 4색당파마다 특색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뭐, 솔까말 조선시대 전공도 아니고 복식사도 아니니 봐도 그게 그거 같습니다. 신라의 사신이 전진의 부견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죠?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그처럼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357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안악3호분의 부인벽화입니다. 나중에 보여질 그림들에 비해 한국색은 거의 없는 얼굴과 옷매무새로 동시대인 전연의 여러 벽화고분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에서 보여지는 고구려에 거주한 여인의 첫 그림은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왕..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DJ. DOC의 신곡 하나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첫사랑이 다른 남자와 있었고, 또 그 다른 남자가 그녀와의 일을 떠벌린 것에 대해 분노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인데 디스야 힙합의 한 문화요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디스와 비교를 거부하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 개개인을 욕하기 보다 이런 노래로까지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뭐, 디스 문화가 그렇게 활성화하지 못한 대다수에게 낯 선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이하늘을 비난하는 목소리 속에는 쿨한 척하는 것이 보여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았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쿨하게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 일이 그렇게 쿨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게 자기의 현실으로 다가올 때 대체 얼마나 쿨할 것인지.. 그 점에..
언젠가 왕의 성격에 대해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순간 그 분과의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뭐랄까 왕과 군신과의 관계에서 두 사람의 개념은 크게 달랐다. 아무리 엿같은 선조의 뻘 짓에도 이순신은 반란이냐 절대적 충성이냐의 갈림에서 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고대의, 좀 더 올라가는 시대의 신하들은 자기의 세력을 통째로 들어 타국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군신의 관계라도 조선시대는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성립되었고 (물론 군권을 제어하는 신권의 장치가 있었으니 전제정권은 아니었다는 건 안다) 고대사는 좀 더 수평적인 관계였다. 귀족과 왕족의 관계는 약간 애매하게 겹쳐있었고, 왕과의 상하관계도 뚜렷하지 않았다. 신라를 예로 든다면 진평왕이 성골을 주장해 일반 왕족과 차이를 ..
몇 주 전인가 일요일 아침에 디스커버리 다큐를 한 편 보았는데 투탕가멘과 그의 아버지 아케나톤에 대한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아케나톤은 범신론이 가득했던 고대사회에 최초로 일신교의 개념을 창시한 사람이다. 그가 아마르나에서 죽자 그동안 눌려왔던 세력들이 어린 파라오를 협박하여 아버지의 개혁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나중에는 투탕가멘도 죽인다. 그것을 보다 생각난 것이 바로 현재의 이집트. 그야말로 일신교인 이슬람교를 믿는 이가 대다수가 아니던가. 이슬람의 뿌리인 유대교도 그 시작은 아케나톤에게 배운 것이니 아마르나가 버려지고 아들은 피살당해도 결국 먼 시야로 보았을 때 아케나톤은 승리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좀 전까지는 아케나톤과 투탕가멘, 그리고 이집트만을 생각해 왔는데 방금, 혜공왕이 떠올랐다. 그는 왕,..
서양사 수업에서 신문화사를 배울 때 기말과제물로 낸 것이 안악 3호분의 행렬도 분석이었다. 벽화에 그려진 병사들에 대해 분석하고 이 병사들이 행진하는 그림 뒤에 숨겨진 당시 군사제도의 변화상을 잡아낸...답시고 주절거렸다. 그땐 석사논문 주제로 잡지 않은 주제에 이걸로 박사 쓸꺼라고 다녔다. ( 왜 후배들의 우행에 태클걸지 않는가.. 지는 더했으니까!) 4세기대의 고구려의 군사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한마디로 국가 공권력으로서의 군대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군대는 부(部)라는 지역공동체의 장, 또 국왕이 거느리고 있던 혼성적인 조직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되기 시작하면서 군대는 국가의 공적 무력으로 탄생하게 된다. 전면적인 징집으로 바뀌게 되어가는 것..
오늘,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제 학부 답사준비 세미나에 갔다 왔다. 답사자료집에 들어갈 내용을 미리 점검하는 자리인데 거기서 재미있는 발표가 두 건 있었다. 그중에서 불국사와 석굴사(석불암)에 대한 발표에서 의문점을 던졌는데 두 절이 가지는 미술사적 의미를 생각할 때, 일개 귀족이 고작 부모를 위해 짓는 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신심이 강하다한들 불상이나 조성하는 정도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먼저 결론을 이야기하면 그 건 틀린 생각이다. 먼저 불국사와 석불사가 아무리 위대한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할만큼 중요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문장을 두 절의 가치가 없단 말로 오해 말기를 바란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절은 황룡사나 사천왕사, 흥륜사 등의 '성전'..
간만에 전공개설서를 다시 읽어보니 고구려의 조세제도에 대한 부분의 여백 위에 "무분별하고 과도한 수탈 →인두세적 조세 →재산세적 조세징수"라는 메모가 적혀있었다. 아마 나름대로 흐름을 정리한 것 같은데 그 조세의 발달에 대한 내 인식에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발견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의 조세는 국가체제의 발전에 따라 합리화의 흐름에 따랐는가? 정말 과거 전근대사회의 조세제도는 무분별하고 과도했던가? 고려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는 내 전공도 아닐뿐더러 갈수록 복잡하게 변해갔으므로 우선 범위를 고대라는 시점, 그중에서 삼국시대로 한정해서 보기로 하자. 이 시기의 조세의 본질은 '규모'라는 한 단어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종전에는 족장族長, 호민豪民 등 공동체에 기반한 지배자들이..
1. 들어가기에 앞서 한국사에서 위만衛滿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일단의 중국인으로 이 땅에 한의 식민지를 건설한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사람으로, 해방 후에는 그에 반발로 연에 끌려갔다가 대탈출을 감행한 모세와 같은 인물로, 아니면 남월南越의 조타를 모델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중국에서 조작한 가공의 인물로 그려졌다. 재야학자들에게는 그저 조선제국의 혼란을 틈타 서쪽을 잠식해 나라를 세운 변방의 패역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암묵적으로 그의 조선은 그전의 조선과 따로 보고 싶어하는 분위기가 남아있는 듯 하다. 여기서는 그의 출신과 그가 조선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 그리고 그가 세운 나라의 성격, 그와 동시기에 유사한 왕조를 세웠던 남월의 조타를 살펴보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