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백제 (28)
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지인들 중에는 역사학 전공자보다 고고학 전공자가 많습니다.석기랑 토기랑 뒹굴링도 오래 하고 그랬는데도(쿠라시나 카나 이전에 먼저 굴렀어요)매번 볼 때마다 외계문물을 보는 것 같습니다.고고학 논문은 아예 외계 문헌이라고 하죠.그래서 국가형성에서 이론 쪽은 좋아해도 세부 각론은 하나도 모릅니다.정말 모릅니다.이 간단한 정리를 기획하며 되도록 문헌사적 정리 위주로 가자고 했는데한 열 편이면 고구려사 글 나오겠지..라고 했는데아뿔싸!! 프랑스 비웃으며 베트남전 참전한 미국애들 심정이 딱 지금 이해됩니다.아무리 문헌사쪽 이야기만 하자고 해도 건국 환경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데문제는 정말 솔직하게 자연환경이라면 모를까 고고학적 환경은 하나도 모른다는 것!(내가 괜히 후기사 전공하는 게 아냐!!!!!) 다음 주쯤이면 ..
원문八月 遣使馬韓 告遷都 遂畫定疆埸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 해석8월,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함을 알리고 드디어 강역을 정하였다. 북으로는 패하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을 경계로 하고, 서로는 큰 바다에 막히고, 동으로는 주양까지 미치었다. - 삼국사기 23, 백제본기 1, 온조왕 13년조 신라편향적인 글만 올리는 와중에 돌아보니 백제 글은 없는지라 이걸 골라놓고는 약간 후회를 했습니다. 백제 건국 초의 마한과의 관계라던가 백제초기 영역의 변화상은 그야말로 학위논문급의 주제입니다. 이 글 하나 쓰자고 백제 초기사를 다시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걸 다 하다간 차라리 출판사랑 계약하고 책 하나 쓰는 게 낫습니다..만 이 백제 초기사도 은근히 베트남 정글같은 분야라 피하고 싶습니다...
원문九年 春正月 … 唐僧法安來 傳天子命 求磁石 … 夏五月 … 遣祇珍山級湌等 入唐獻磁石二箱 … 번역9년 봄 정월에 … 당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천자의 명을 전하여 자석을 구하였다. … 여름 5월에 … 급찬 기진산(祇珍山) 등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자석 두 상자를 바치게 하였다 …- 삼국사기 6, 신라본기 6, 문무왕 상 문무왕 9년, 669년의 신라는 참 다사다난한 해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에게 이 9년의 기사 전체가 친숙합니다. 말줄임표로 넘어갔지만 문무왕의 민생안정조서가 나온 해이기도 하고,당에 신라의 쇠뇌 기술자 구진천이 불려가서 쇠뇌를 만들어야 했고요김흠순과 김양도가 나당전쟁을 최소화시키려는 외교절충을 하러 떠나기도 했습니다.(김양도는 당의 감옥에서 옥사합니다)마지막으로 신분제와 관등제 ..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고구려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동(遼東)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고구려가 위엄을 두려워하여 강화를 청하자 문황(文皇 태종)이 항복을 받고 대가(大駕..
올 초에 공산성에 갔을 적에 공산성 내 공북루쪽의 성안마을에 대한 조사가 진행중이었는데 바로 여기서 백제의 갑옷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갑옷은 가죽 찰갑이며 옻칠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최고급인 제품이지요. 저수시설 바닥에 인접한 곳에서 발굴된 것을 보니 습기 덕분에 명문같은 것이 잘도 살아남았습니다. 물론 가죽부분은 사라졌고, 그 위를 두껍게 덮어쓴 옷칠 부분만 남았습니다. 갑옷에서는 아래와 같은 명문이 있습니다. ‘○○行貞觀十九年四月二十一日’, ‘王武監’ ‘大口典’ ‘○○緖’ ‘李○銀○’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정관 19년이라는 연대입니다. 정관은 당 태종의 연호로 19년은 고구려와 전쟁을 벌였던 645년입니다. 이 갑옷이 언제쯤 만들어졌느냐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적어도 이 것이 누..
쇼토쿠태자(574~622)가 세운 시텐노지(사천왕사四天王寺)는 일본 고대사의 중요한 무대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587년 일본에서 불교의 도입을 둘러싸고 모노노베씨와 소가씨가 싸울 적에 불교도입을 주장한 소가씨의 편에선 태자가 사천왕에게 기원을 한 후 창건하였다고 합니다. (언젠가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요) 소가 우마코가 세운 아스카데라(비조사飛鳥寺)와 함께 일본 최초의 사원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천왕사에선 쇼토쿠 태자를 자랑스럽게 내세우지요. 잠시 쇼토쿠태자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요메이천황(용명)의 아들로 우마야도라고도 불렸습니다. 고모인 스이코천황(추고)이 즉위하자 당대의 실력자 소가 우마코와 연합하여 섭정으로 활동합니다. 603년의 12관계 도입, 604년의 헌법 17개조를 반포했고..
지난 일요일에는 몽촌토성에 다녀 왔습니다. 원래는 풍납토성자리도 같이 보는 것이 계획이었으나 어찌어찌하여 풍납토성은 포기하고 몽촌만 돌았습니다. 몸상태가 그닥이어서 자세히 돌지는 않았으나 성이 가지는 본연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한정한 나들이였어요. 몽촌토성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올 겨울 특집으로 해도 모자랄 겁니다. 그런 매우 귀찮고도 어지러운 작업은 제껴두고 그냥 성을 찍은 사진만 나열합니다. 몽촌토성이 과연 왕성이냐 도성이냐 아니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어느 것이 백제의 왕성, 도성이냐를 두고 십여년 가까이 논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아무렴 어때..에 가깝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왕성이 항상 고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를 예로 들어보면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었..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100413070210444&p=yonhap 오늘 아침에 매우 흥미로운 뉴스가 히나 나왔습니다. 백제시대의 마약조달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제목의 뉴스죠. 매일 왕과 귀족들의 정쟁,(사실 이것도 당시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겠다는 방향의 논쟁입니다) 쉬지 않고 치고박는 전쟁 얘기나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겐 솔깃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1년을, 평생을 살아갔는지에 대한 자료는 희소한 상황이니 말이죠. 과연 백제에도 마약이 있었는가.. 마약이 결코 좋은 물건은 아니겠으나 그 시대에도 있었는가는 흥미로운 것입니다. 그럼 한식산/오석산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을 먹었는가에 대해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