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두보의 '석호의 관리'에선 아들들을 모두 징집하고도 모자라 할아버지를 데려가겠다며 관리가 문을 두드린다. 산상억량의 '빈궁문답가'에선 밀린 세금을 내라고 촌장이 문을 두드린다. 시대는 늦지만 '청산별곡'에서는 이링공디링공하야 선을 넘으니 사슴이 울타리에 올라 금을 켜는 환성을 본다. 언젠가 이거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만 다시 끄집어낼 일이 생긴다.(목가죽 한 장이 엄청 즐겨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내년 상반기..읍읍) 일단 뇌의 먼지부터 털고.. 직관지/백관지, 혹은 당육전의 정교한 설계도, 혹은 스냅사진, 또는 매우 긴 시간 노출을 해서 찍은 사진만 놓고보면 아름답다 못해 현자타임 가질 판이다. 그 기록에는 아랫것들의 파열음이 들리지 않는다. 옹정제가 아닌 이상, 즈은하~ 태평..
340년대, 고국원왕은 선대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대외확장정책에서 실패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5호16국시대라는 중국의 대혼란을 틈타서 낙랑・대방군을 몰아내고 요동군과도 치열하게 싸우고 성공을 거둔 아버지 미천왕과 달리 고국천왕은 강한 저항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부의 전연이 환도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그러니까 미천왕의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끌고 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구려는 요동을 둘러싼 전연과의 다툼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남으로 창끝을 돌리면 어떨까? 낙랑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던 곳에 비해 남쪽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 ..
어떤 책을 보다가 고구려에 무언가를 만드는 관청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문장을 발견했다. 암만 기억을 더듬어도 그 관청에 대한 문헌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인에 의한) 다른 자료를 봐도 그것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언급이 나타난다. 그러면 유물에서 명문이 발견된 것일까? 그 앞서 시기별로 나온 그분의 글을 찾아보니, **유적을 살펴본봐 ~~을 제작하는 장소는 보이지 않으나 그러한 역할을 하는 관청이 존재하지 않았을까라는 식으로 서술된 대목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 것이 현재로 넘어오면서 의문에서 단정으로 바뀐 것이다. 어쨋든 만드는 곳은 있었을 것이고 신라나 백제에서 보듯 관이 주도하는 생산체계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그것은 높은 확률이다. 확실히 관청의 존재를 단정지을 자료는 없다. 실제로 통..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고대의 시대구분선으로 통일전쟁기를 꼽는 것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역시 기존의 나말여초가 시대구분의 획기로써 더 적절하다고 본다. 대개 통일신라의 관료제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런입장도 나름 타당하다. 그러나 표면적인 관부 설치와 그 구성, 명칭의 일부만 당제인 근본적인 구조도 관료제라고 할 수 있을까? 신라의 국가운영시스템이나 사회구조는 관료제의 원천기술격인 당율령제와는 다르다. 극히 일부는 빼고 표면적으로라도 어떻게든 유사한 체제를 구축하려한 일본과도 다르다. 발해? 완전히 뿌리까지 뽑혀나간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나? 차라리 미야자끼 이찌사다가 위진남북조 시대의 귀족들을 일러 관료제의 탈을 쓴 신분제라고 하는 게 실상에 가깝다. 만약 통일전쟁기가 ..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서 무슨 성과가 나오면 4대강에 들인 돈으로 저걸 했으면..하는 이야기는 박멸되지 않고 지겹게 반복이 된다. 솔직히 4대강에 찬동한 것들 이상으로 해로운 것이 그런 글을 되풀이하는 작자들이다.(솔직히 말하자면 물을 보면 기분이 나쁘지 않잖아요라던 조뭐시기 보는 것 만큼이나 구역질 난다) 일본 애들이 성공적으로 소행성 샘플 가져오고, 얼마전에 또 하나 소행성에 접근하고 그게 조만간 샘플 회수를 한다지. 그거 20조만 들어서 한다면 국민 성금이라도 했지. 걔들이 80년대부터 얼마나 많은 폭발을 겪은 것은 생각도 안하지. 90년대에 얼마나 조롱이었나를 알기나하나. 일본은 그렇다 치고 미국은? 개들은 사람 죽은 것만 두자리수다. 로씨야? 거긴 죽은 사람도 극비고, 우연히 무선통신사들 채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