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오늘은 고대사대신 근현대사, 또는 세계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뭐, 맨날 부식옵하 이야기만 지겹지 않습니까?) 일단, 짐순이가 살고 있는 춘천을 무대로 한정해봅니다. 요즘은 만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사회적경제라는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인연이 있는데 이 분들과의 대화에서 떠오른 생각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욕하는 것이 아니니 초장부터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춘천에서 사회적경제라는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아직 춘천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강원도 영서에서 춘천과 묘한 경쟁관계를 구축중인 원주는 한국 사회적경제의 성지같은 곳이고, 또 새롭게(아니 이제 고인물인가?) 충남 홍성같은 곳이 대두하는 것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협동조합 교육으로 원..
대항해 시대 이전에도 세계는 어렴풋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늘 있어왔다. 앙리 피렌느도 지중해 한정 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고, 누군가 세계체제 이전의 교역망에 대해 다룬 것도 책으로 있었고(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 뭐 근세 르네상스 이전에도 르네상스는 여러번 있었다는 것처럼. 8~9세기의 동아시아도 나름 해상교역망이 촘촘하게 짜여진 건 사실이고 장안과 광주, 그리고 울산을 연결하면 유라시아대륙의 서쪽과도 이어지는 선이 드러난다. 나라의 정창원을 뒤지면 일본과 왕래가 없던 인도 출처의 약재가 나오고, 2~3세기 돈황에서 신던 것과 거의 유사한 펠트 신발이 나온다. 경주의 왕릉에서 딱봐도 서역스런 사람의 석상이 보이는 건 과연 우연일까? 시오노 나나미가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말한 것같은 해상..
두보의 '석호의 관리'에선 아들들을 모두 징집하고도 모자라 할아버지를 데려가겠다며 관리가 문을 두드린다. 산상억량의 '빈궁문답가'에선 밀린 세금을 내라고 촌장이 문을 두드린다. 시대는 늦지만 '청산별곡'에서는 이링공디링공하야 선을 넘으니 사슴이 울타리에 올라 금을 켜는 환성을 본다. 언젠가 이거 이야기를 해야지 하고 묵혀두었던 이야기들이 있었다만 다시 끄집어낼 일이 생긴다.(목가죽 한 장이 엄청 즐겨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내년 상반기..읍읍) 일단 뇌의 먼지부터 털고.. 직관지/백관지, 혹은 당육전의 정교한 설계도, 혹은 스냅사진, 또는 매우 긴 시간 노출을 해서 찍은 사진만 놓고보면 아름답다 못해 현자타임 가질 판이다. 그 기록에는 아랫것들의 파열음이 들리지 않는다. 옹정제가 아닌 이상, 즈은하~ 태평..
340년대, 고국원왕은 선대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대외확장정책에서 실패를 맛보고 있었습니다. 5호16국시대라는 중국의 대혼란을 틈타서 낙랑・대방군을 몰아내고 요동군과도 치열하게 싸우고 성공을 거둔 아버지 미천왕과 달리 고국천왕은 강한 저항에 전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부의 전연이 환도성을 점령하고, 미천왕의 시신과 태후(그러니까 미천왕의 왕비), 그리고 5만여 명의 사람들이 끌고 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고구려는 요동을 둘러싼 전연과의 다툼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지요. 그렇다면 남으로 창끝을 돌리면 어떨까? 낙랑과 대방군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남쪽의 백제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던 곳에 비해 남쪽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 ..
어떤 책을 보다가 고구려에 무언가를 만드는 관청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문장을 발견했다. 암만 기억을 더듬어도 그 관청에 대한 문헌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인에 의한) 다른 자료를 봐도 그것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언급이 나타난다. 그러면 유물에서 명문이 발견된 것일까? 그 앞서 시기별로 나온 그분의 글을 찾아보니, **유적을 살펴본봐 ~~을 제작하는 장소는 보이지 않으나 그러한 역할을 하는 관청이 존재하지 않았을까라는 식으로 서술된 대목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 것이 현재로 넘어오면서 의문에서 단정으로 바뀐 것이다. 어쨋든 만드는 곳은 있었을 것이고 신라나 백제에서 보듯 관이 주도하는 생산체계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그것은 높은 확률이다. 확실히 관청의 존재를 단정지을 자료는 없다. 실제로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