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그러면 정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장보고와 때로는 경쟁하듯, 때로는 사선을 같이 넘은 정년은 어디에 서있었던 것일까요? 바다를 주무르던 장보고의 곁에 정년이 서있지 못할까요? 무언가 사연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 원문 保臯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水縣 一日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臯” 元規曰 “若與保臯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 - 번역문 (장)보고가 귀해진 동안에 (정)년은 관직에서 물러나 춥고 굶주린 상태였다. 사주 연수현에 머물던 어느 날, 수장인 풍원규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는 동으로 돌아가 장보고에게 의탁할 생각입니다’라고 하니 원규가 말하기를 ‘보고와 더불어 같이 하지 못한다면(같이 살 수 없다면) 어..
서로 아옹다옹 다투기만 하던 장보고와 정년은 스스로의 활로를 개척하기로 합니다.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한 것일까요. - 원문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保臯還國 謁大王曰 “遍中國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臯萬人 此後海上無鬻鄕人者 - 번역문 두 사람이 당에 가서 무령군의 소장이 되었다. 말 타고 창을 사용함에 있어 능히 (그들에게) 대적할 자가 없었다. 후에 (장)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을 뵙고 말하기를 “무릇 중국을 돌아보니 우리 사람이 노비가 되어 있습니다. 원컨대 (저로 하여금) 청해에 진을 설치하여 사람을 잡아 도적들로 하여금 서쪽(당)으로 가지 못하게 하옵소서”라 하였는데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 지금(고려)은 완도라 한다. 대왕은 보..
왜 뜬금없이 동화라고 했는지는 이어지는 글 마지막에 밝히고자 합니다. 친절한 설명은 생략하고 바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원문 張保臯羅紀作弓福ㆍ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噎 角其勇壯 保臯差不及也 年以兄呼保臯 保臯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 번역문 장보고(신라본기에는 궁복이라고 적혀있다)와 정년(년은 따로 련으로 적기도 한다)은 모두 신라인이다. 단 향읍과 선조의 일은 알지 못한다. 모두 싸움질을 잘했으며, (정)년은 특히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잘 했는데, 오십리를 가도 숨을 참을 수 있었다. 날래고 장함으로 견주자면 보고는 (정년)다음으로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연은 보고를 형이라 불렀다.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써 항상 어긋나듯 부딛쳐 서로 아래에 놓..
이제 공주의 내조가 빛을 볼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 원문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羣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常在前 所獲亦多 - 번역문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 삼월 삼일에 낙랑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여 멧돼지와 사슴을 잡았다. (그것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를 올렸다. 그 날에 이르러 왕은 사냥에 나서 군신과 5부의 병사들이 모두 따랐다. 이에 온달도 길렀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다. 그 치고 나감이 항상 앞에 있으니 사로잡은 것이 또한 많았다. 수서 고려전에 따르면 '매해 봄과 가을에 교외에서 사냥대회다 열리니 왕은 친히 참석한다'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때의 삼짓날 사냥대회는 거국적인 행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 수렵대회..
서양사 수업에서 신문화사를 배울 때 기말과제물로 낸 것이 안악 3호분의 행렬도 분석이었다. 벽화에 그려진 병사들에 대해 분석하고 이 병사들이 행진하는 그림 뒤에 숨겨진 당시 군사제도의 변화상을 잡아낸...답시고 주절거렸다. 그땐 석사논문 주제로 잡지 않은 주제에 이걸로 박사 쓸꺼라고 다녔다. ( 왜 후배들의 우행에 태클걸지 않는가.. 지는 더했으니까!) 4세기대의 고구려의 군사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한마디로 국가 공권력으로서의 군대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군대는 부(部)라는 지역공동체의 장, 또 국왕이 거느리고 있던 혼성적인 조직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되기 시작하면서 군대는 국가의 공적 무력으로 탄생하게 된다. 전면적인 징집으로 바뀌게 되어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