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대개의 경우 딸이 아버지에게 대들어서 좋다고 하악하악할 부모는 화성인을 만나기보다 어렵습니다. 바로 평강왕도 그런 평범한 아버지입니다. 원문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於是 公主以寶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번역문 왕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나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즉 나의 딸이라 할 수 없다. 어찌 같은 곳에 살 수 있겠느냐. 마땅히 네가 가고자 하는 바를 따르는 것이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는 보석 팔찌 수십매를 팔꿈치 뒤에 매고 홀로 궁궐을 나왔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으로 가는 길)을 묻고 바로 그 집에 이르렀다. 드디어 공주가 쫓겨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뚜껑이 열린 상태라 ..
앞에서 온달을 소개했으니 이제는 여주인공인 공주를 소개할 차례입니다. 대개 평강공주라고 불리고 있으나 실제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평강공주라는 이름은 평강왕의 공주라는 뜻으로 불립니다. 자, 기록을 살펴보죠. - 원문 - 1. 平岡王少女兒好啼 2. 王戲曰 “汝常啼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3.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4.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 번역문 - 1. 평강왕에게는 작은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울기를 잘하였다. 2. 왕이 놀리며 말하기를 "너는 항상 울어 내 귀를 아프게 하는구나. 장차 커서는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으니 마땅히 바보(같은) 온달에게 시집보낼 수 밖에 없구..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관련된 전설로 그가 삼국사기를 펴내면서 과거의 사료를 불태워 자신의 저작만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그랬던 것일까? 김부식보다 한참 뒤에 살았던 이규보의 글에서 한가지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동명왕(東明王)의 신통하고 이상한 일을 많이 말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내가 일찍이 그 얘기를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선사(先師) 중니(仲尼)께서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다.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기괴하여 우리들이 얘기할 것이 못된다.” 하였다. 뒤에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 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으니, 국내의 것은 자세히 하고 외국의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
자, 시작해볼까요? 드디어 삼국사기 권45, 열전5 온달전의 첫머리, 온달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먼저 왼쪽의 문장을 보기 쉽게 옮겨봅니다. - 원문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曉1)然 家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 해석문 온달은 고구려의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용모는 파리하여2) 우스웠으나 마음만은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니 항상 음식을 구걸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으로 저자거리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바보(같은) 온달이라 하였다. 주 : 1) 정문연 본에 따라 曉로 수정 2) 龍鐘 : 늙고 여위었다는 뜻이나 파리하다로 수정. 이기백, '온달전의 검토'("백산학보" 3, 1967 ; "한국고대정..
간만에 전공개설서를 다시 읽어보니 고구려의 조세제도에 대한 부분의 여백 위에 "무분별하고 과도한 수탈 →인두세적 조세 →재산세적 조세징수"라는 메모가 적혀있었다. 아마 나름대로 흐름을 정리한 것 같은데 그 조세의 발달에 대한 내 인식에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나마 발견하게 되었다. 과연 우리의 조세는 국가체제의 발전에 따라 합리화의 흐름에 따랐는가? 정말 과거 전근대사회의 조세제도는 무분별하고 과도했던가? 고려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는 내 전공도 아닐뿐더러 갈수록 복잡하게 변해갔으므로 우선 범위를 고대라는 시점, 그중에서 삼국시대로 한정해서 보기로 하자. 이 시기의 조세의 본질은 '규모'라는 한 단어로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종전에는 족장族長, 호민豪民 등 공동체에 기반한 지배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