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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무언가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침받이를 해야할 정도로 질질 흘리죠. 제작년에 오사카의 중고서점에서 3일만에 읽는 일본사인가 하는 책을 샀는데 거기에 헤이안시대의 신분구조를 다룬 표 하나 때문에 일본글을 모르는데도 샀습니다. (귀국해서 그 책 번역본이 오래전에 나온 걸 알고 또 샀죠..) 신분제는 유달리 도표가 효과적인 장르(?)입니다. 각종 신분 규제라던가, 상승제한선이라던가, 각 신분별 인구분포라던가, 소유가능한 재산이라거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 하나가, 표 하나가 더 쉽게 들어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나온 책에서 기가 막힌 그림 하나를 발견했죠. 대교 소빅스에서 나온 "우리문화탐험"의 17권 '선사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신분제도'의 한 장입니다. 사실 어린이 역사책이..
1. 7세기 후반 고구려사의 아이콘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7세기 후반 고구려사를 연구하는 데 절대 빠질 수 없는 일이다. 관심을 쏟고 있는 6세기에 비해 사료도 많고(문헌기록과 묘지명..) 사건도 별별 것이 다 일어나고 있으나 그를 이야기 하지 않고 7세기 후반-멸망기를 이야기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근 100년 가량 활활 타올랐던 전시상태의 결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아예 연개소문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있기나 하나 만약 그런 연구자가 있다면 용자거나 바보거나.. .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일부에서는 그를 매우 남자답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영웅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좀 신중하게 접근하는 쪽이다. 그의 집권이 고구려 귀족사회의 원심분리적 이탈을 가속시켰다고 보기도 하고 신라를 친당외교로 ..
http://media.daum.net/digital/view.html?cateid=1050&newsid=20110427160031167&p=akn 미야자키 이찌사다의 "옹정제"의 말미 역사 후기에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미야자키와 일군의 연구자들이 모여 옹정제가 남긴 방대한 문서들을 읽고 정리하는 기나긴 시간. 누군가 이거 지겨운 거라고 투덜거렸더니 어느 한 사람이 그랬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학문이다" 그냥 읽어보면 고작 이거 말할라고 그 난리를 피웠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학문이 반드시 아주 대단하고 신기한 것만 다루고자 한다면 그건 이미 항문이 된 지 오래된 후의 일일 것이다. 틀렸더라도 그게 왜 틀린 것인지, 맞아도 왜 그게 맞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학문이다. 이 기사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삼..
천무천황의 손자이자 고시황자의 아들인 장옥왕(나가야왕, 684?~729)은 어느 날 자신의 저택에서 신라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한 수 읊습니다. 높은 가을 하늘에는 멀리 석양이 비치고 먼 봉우리에는 자욱한 안개가 깔려있다. 금란과 같은 굳고 친밀한 교류를 사랑함이니 청풍명월의 자리에서 피로한 줄도 모른다. 계수나무 행기로운 산에 머무는 석양빛이 발하고 국화 향기로운 포구에는 낮게 펼쳐진 저녁놀이 선명하다. 일본과 신라 사이가 푸른 물결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지 말게나 언제까지나 연석에서 무르익은 사념은 시로 풀어 버리세. - 사호의 저택에서 신라손님을 위해 연회를 열다. 다른 시의 주를 보면 이 시는 726년의 가을에 쓰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과의 교류에서 통일 이후 공식적인 관계가 단절되는 77..
어느 조선시대사 분이 그럽디다. 10년마다 여인네들 옷 매무새가 달라진다고.. 유방의 노출의 폭이나 치마길이 등에 변화가 있다는군요. 끽해야 4색당파마다 특색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뭐, 솔까말 조선시대 전공도 아니고 복식사도 아니니 봐도 그게 그거 같습니다. 신라의 사신이 전진의 부견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죠? 중국에서 시대가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는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습니까. 그처럼 모든 것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357년에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안악3호분의 부인벽화입니다. 나중에 보여질 그림들에 비해 한국색은 거의 없는 얼굴과 옷매무새로 동시대인 전연의 여러 벽화고분과 유사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림 속에서 보여지는 고구려에 거주한 여인의 첫 그림은 이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왕..
원래 계획은 24일은 사천왕사-오사카성-오사카역사박물관을 돈다였습니다. 작년에는 오사카에 머물면서도 오사카보다는 나라-교토에서 놀았으니 이번에는 오사카도 충분히 보자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숙소를 나섰습니다. 난바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 사천왕사 앞에서 내립니다. 문제는, 그러니까 이날 일정을 다 뭉개버린 문제가 여기서 발생했지요. 바로 길을 잃어버린 거. 다음날이나 마지막 날이나 얼굴이 두꺼워져 막 물어봤지만 (아니 오후부터도 잘 물어보고 다녔어요) 이 상황에선 부끄러워 물어보지도 못하고 정 반대로 한참을 걸어갔지요. 하염 없이, 하염 없이.. 저 천왕사 주차타워 간판 하나보고 저 옆에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요. 한참을 걸어가도 사천왕사(천왕사)는 커녕 인왕사도 안보이기에 겨우겨우 용기를 내어 어느..
지난 일요일에는 몽촌토성에 다녀 왔습니다. 원래는 풍납토성자리도 같이 보는 것이 계획이었으나 어찌어찌하여 풍납토성은 포기하고 몽촌만 돌았습니다. 몸상태가 그닥이어서 자세히 돌지는 않았으나 성이 가지는 본연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한정한 나들이였어요. 몽촌토성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올 겨울 특집으로 해도 모자랄 겁니다. 그런 매우 귀찮고도 어지러운 작업은 제껴두고 그냥 성을 찍은 사진만 나열합니다. 몽촌토성이 과연 왕성이냐 도성이냐 아니면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어느 것이 백제의 왕성, 도성이냐를 두고 십여년 가까이 논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아무렴 어때..에 가깝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왕성이 항상 고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조선시대를 예로 들어보면 조선의 정궁은 경복궁이었..
10월 23일로부터 26일까지, 올해도 어김없이 정창원전이 나라박물관에서 열려 거길 다녀왔습니다. 작년엔 셋이 갔지만 올해는 혼자서, 그래서 더 좌충우돌하고 헤메고 다녔지만 재미는 있었네요. 슬슬 그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첫날과 마지막날은 오사카에서 보냈지만 가운데 이틀은 나라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니 고대사와 관련 없는 사진들이 초장부터 나와도 걍 넘어가는 겁니다. ------------------------ 23일 오후 2시 비행기라 간사이공항에 도착한 것은 4시, 수속밟고 공항에서 오사카로 떠나는 난카이선 급행열차를 타고나니 벌써 저녁이 시작됩니다. 작년에는 공항이나 전철 안에서 사진이라도 찍었는데 혼자려니 쑥스럽고 얼른 숙소라 가려 해서 사진기를 꺼낼 여유는 없었습니다. 비행기 도착 때까지 긴..
정말 오래간만에 삼국사기를 다시 읽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온달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장보고가 앞으로 튀어 나왔고, 또 살다보니 다시 잡는데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뭐, 인기블로그 되겠다고 시작한 게 아니니만큼, 이따금 찾아와주시는들도 그냥 이 블로그는 한 달에 한 편 이상 올리는 곳이라 생각해주시길.. - 원문 五年 春正月 .. 漢祇部人夫道者 家貧無諂 工書算 著名於時 王徵之爲阿湌 委以物藏庫事務 - 번역문 5년 봄 정월에 .. 한기부 사람 부도가 집은 비록 가난하나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 글과 셈을 잘하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왕은 그를 불러 아찬으로 삼고 창고의 일을 맡겼다. 그냥 사료를 읽으면 왕이 착하고 능력있는 자를 얻어 창고일을 시켰다.. 정도로 지나칠만한 기사입니..
삼국사기에 인용된 자료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선은 확실한 인용이 있는 것만 추려보니 총 65건 이상이 발견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국내기록을 추려보면 아래 표와 같습니다.
지난 14일부터 17일까지 서안과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서안에서 진시황의 병마용갱과 대안탑은 보고 싶었습니다. 북경은 그닥 관심이 없었구요. 선진시대 연의 수도로서, 혹은 위진남북조시대의 계라는 도시라면 모를까 명청이야 그닥인 것은 전공상 어쩔 수 없군요. 서안에서 가장 기대한 것은 대안탑이었습니다. 옛 장안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건축물인 그 것을 신라의 사신들이나 끌려왔던 고구려인들이나 백제인이라면 누구나 보았겠지요. 지금 서안보다 더 큰 옛 장안의 흔적을 알려주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중요했습니다. 6752년에 삼장으로 유명한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여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고 제자들을 기른 자은사에 세워진 탑입니다. 고종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고 하는군요. 여기엔 불경을 보..
부치지 못한 편지라는 DJ. DOC의 신곡 하나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첫사랑이 다른 남자와 있었고, 또 그 다른 남자가 그녀와의 일을 떠벌린 것에 대해 분노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인데 디스야 힙합의 한 문화요소이기도 하지만 다른 디스와 비교를 거부하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 개개인을 욕하기 보다 이런 노래로까지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뭐, 디스 문화가 그렇게 활성화하지 못한 대다수에게 낯 선 것은 사실이죠. 그런데 이하늘을 비난하는 목소리 속에는 쿨한 척하는 것이 보여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았습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쿨하게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사람 일이 그렇게 쿨할 수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게 자기의 현실으로 다가올 때 대체 얼마나 쿨할 것인지.. 그 점에..
한달은 넘기지 말아야지라고 마음먹었는데 결국 한 달을 넘겼습니다. 뭐 주목받는 글은 아니지만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은 그것이 아니죠. 오늘은 드디어 장보고전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글도 정말 변비 같아서 나오는 것도 힘들지만 속에서 삭히는 것도 병이 됩니다. 왜 장보고전은 행복한 결말일까요? 김부식은 무슨 생각으로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열전에 넣었을까요? 오늘 풀어야 할 의문은 두 가집니다. 자, 하나 하나 풀어보도록 하지요. 아시다시피 장보고의 결말은 비극적입니다. 839년에 신무왕 우징을 도와 민애왕정권을 무너뜨린 장고보는 식읍 2천호를 받는 등의 지극한 대접을 받습니다. 신무왕이 즉위 직후 죽자 아들 경응이 문성왕으로 즉위하는데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임명합니다. 게다가 그의 딸을 둘째 왕..
슬슬 끝내야할 때가 왔군요. 진작에 나왔어야 할 이 글이 늦게 나온 이유는 아마 끝맺는 걸 귀찮아 하는 성격 탓도 있지만 어떻게 폼나게 끝내볼까 궁리하다 보니 늦어진 것이겠지요. 하지만 언제까지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인상 쓸 수도 없는 법. 이제 결말을 향해 달려가 봅시다. [원문] 謁保臯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臯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臯爲相 以年代守淸海 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 故兩存之 [번역문] (정년이) 보고를 만나니 마시는 것이 지극히 환대하는 걱이었다. 그 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당하는 국난이 일어나 주인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보고가 병사를 나누어 5청명을 정년에게 주고, 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그 대가 아니면 이 난..
언젠가 왕의 성격에 대해 어느 분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순간 그 분과의 대화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뭐랄까 왕과 군신과의 관계에서 두 사람의 개념은 크게 달랐다. 아무리 엿같은 선조의 뻘 짓에도 이순신은 반란이냐 절대적 충성이냐의 갈림에서 충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고대의, 좀 더 올라가는 시대의 신하들은 자기의 세력을 통째로 들어 타국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군신의 관계라도 조선시대는 수직적인 상하관계가 성립되었고 (물론 군권을 제어하는 신권의 장치가 있었으니 전제정권은 아니었다는 건 안다) 고대사는 좀 더 수평적인 관계였다. 귀족과 왕족의 관계는 약간 애매하게 겹쳐있었고, 왕과의 상하관계도 뚜렷하지 않았다. 신라를 예로 든다면 진평왕이 성골을 주장해 일반 왕족과 차이를 ..
몇 주 전인가 일요일 아침에 디스커버리 다큐를 한 편 보았는데 투탕가멘과 그의 아버지 아케나톤에 대한 것이었다. 아시다시피 아케나톤은 범신론이 가득했던 고대사회에 최초로 일신교의 개념을 창시한 사람이다. 그가 아마르나에서 죽자 그동안 눌려왔던 세력들이 어린 파라오를 협박하여 아버지의 개혁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나중에는 투탕가멘도 죽인다. 그것을 보다 생각난 것이 바로 현재의 이집트. 그야말로 일신교인 이슬람교를 믿는 이가 대다수가 아니던가. 이슬람의 뿌리인 유대교도 그 시작은 아케나톤에게 배운 것이니 아마르나가 버려지고 아들은 피살당해도 결국 먼 시야로 보았을 때 아케나톤은 승리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좀 전까지는 아케나톤과 투탕가멘, 그리고 이집트만을 생각해 왔는데 방금, 혜공왕이 떠올랐다. 그는 왕,..
문제의 사리봉안기, 하얀 밑줄이 문제의 대목, 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 백제 왕후는 좌평인 사택적덕의 딸이다. 출처 : 09년 1월 19일자 문화재청 보도자료 미륵사지 서탑에서 나온 사리기의 발견으로 좀 뒤숭숭하더니 급기야 이런 신문기사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http://newslink.media.daum.net/news/20090121162214723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jeolla/view.html?cateid=100009&newsid=20090121162214723&p=yonhap 사리기의 출토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나니 당황스럽기보다는 통설과 다른 논지들이 떠오르더군요. 많은 학자들이 무왕설에 지지를 보냈지만 뭔가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http://media.daum.net/culture/view.html?cateid=1026&newsid=20100413070210444&p=yonhap 오늘 아침에 매우 흥미로운 뉴스가 히나 나왔습니다. 백제시대의 마약조달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제목의 뉴스죠. 매일 왕과 귀족들의 정쟁,(사실 이것도 당시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겠다는 방향의 논쟁입니다) 쉬지 않고 치고박는 전쟁 얘기나 들어야 하는 사람들에겐 솔깃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1년을, 평생을 살아갔는지에 대한 자료는 희소한 상황이니 말이죠. 과연 백제에도 마약이 있었는가.. 마약이 결코 좋은 물건은 아니겠으나 그 시대에도 있었는가는 흥미로운 것입니다. 그럼 한식산/오석산이란 무엇인가, 왜 그것을 먹었는가에 대해 기..
일전에 후배가 한 명 더 늘었습니다. 매번 읽어야할 책을 골라 적어주는데 이번에는 해야할 숙제까지 넣어주었습니다. 분명 한국고대사인데 고대사 책은 단 한 권 뿐입니다. 선생님도 있고 저 말고도 선배들은 많으니 전공책 추천이야 어렵게 구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만 공부를 계속 하다 보니 좀 더 다른 시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지요. 더욱이 대외관계사를 공부할 친구라 고대사책만 읽는 것은 절대 피해야할 상황입니다. 아래 목록의 시작은 10년도 더 된 것이라 웹 상에도 다른 곳엣 몇 차례 추천도서로 올린 것도 있어요. 하지만 그 사이에 관심분야나 시각이 매우 많이 바뀌었고 읽어야 할 후배들의 관심도 저마다 다르기에 혹여라도 보신 분들이 계시다면 좀 다를껍니다. 몇 권은 새로 들어간 것이 있습니다. 빠진 것도 있겠지..
시중에 돌고 있는 삼국사기에 대한 책의 상당수는 삼국사기에 대한 번역이거나 아주 전문적인 연구서들입니다. 많이 들어본 이름과 달리 친숙하게 접근할 수도 없죠. 예전처럼 논어 맹자는 유치원 때 다 읽었다는 시절도 아니니 번역서를 편다해도 그 생경한 단어들과 지금과 너무 다른 글쓰는 방식에 의해 편안하게 읽지는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누군가 (역시나 제대로 읽지못한) 한 말을 이어받아 확대재생산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게다가 인터넷의 보급으로 유사역사학이 더 활기를 찾아감에 따라 삼국사기는 그 실체를 잘 모르니 신비주의로 포장되기는 커녕 실체와 반대로 너덜너덜해지고 있지요. 전문서이긴 하지만 학부생의 수업용으로도 손색이 없는 책 한 권 소개하고자 합니다. 정구복, 『삼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