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M-79의 삼국사기 이야기
그제, 한성백제박물관에서 '고대'의 개념에 대한 학술대회가 열렸습니다. 사실 시대구분론을 매우 둏아하는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거였는데, 거기에 아예 세계사라는 더 거대한 틀에서 어떻게 보아야하는가에 대한 내용이라 더 둏을 수 밖에 없었지요. 정말 이런 거 취향저격입니다. 이런 방법론은 한림대에서 열었던 시대구분론 세미나 이후 다시 시도된 것인데, 그때는 한국사 위주의 발표에 듕궉사, 서양사 전공자들을 불러 토론을 붙였다면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발표를 맡긴 것이라 더 의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사의 시대구분론 자체는 경제사학회 이후 정문연과 국편, 단국대 한국학연구소에서 다룬 적이 있고, 고대사학회에서 한국고대의 시대구분론을 가지고 크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유행처럼 사그라들었는데 역..
사료비판, 아예 역사이론 자체가 상당히 무시받는 종목이다. 독해(정확히는 판독)능력이 사료 해석의 전부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갠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를 영역판과 국내 번역본을 비교해가며 살펴본 일이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장 정확한 서술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4권이었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의 문제점은 이쪽 바닥의 사람이면 다 아는 이야기겠으나 해당 사적에 대한 평가는 자의적이지만 되려 당시의 역사상 등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종의 번역본에서는 아예 기본적인 로마 군제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기까지 한다.(지금 최선본이라 불리는 것에서도 발견) 어떤 번역본은 영문학 전공자가 번역했고, 어떤 것은 라틴어 원전을 번역한 것이다..
고대국가에서 관료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갠적으로, 개機적으로 고려시대도 관료제의 외피를 쓴 귀족제 국가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관료제론은 학설사로서의 의의는 있겠으나(연구 질적으로 심화) 실제 연구에 있어서는 사료를 넘어선 가정에 불과하다. 고구려는, 고구마 대제국은 질서정연한 관료제와는 거리가 먼 형태다. 어지간하면 고대사의 변명거리인 '자료가 없어서 그렇지 ~~을지도 모른다'를 쓸 여지도 없다. 수당에게 있어서 고구마는 돌궐을 제칠 수는 없겠으나 토번에 이어 악의 축에 들 정도의 중요도는 가진다.(위구르도 있지만 이건 고구려멸망 후의 문제라 여기선 뺀다) 고창국을 멸망시킨 후 병부 직방낭중 진대덕이 와서 정보를 살폈다는 건 상식이다. 그러나 한국사에서는 의외로 병부 아래, 아니 6부 아래 4개의 담..
전쟁 중 약탈과 학살이 일어나는 일은 선사시대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수렵과 채집, 어로를 통한 자연의 식량거리를 수확하는 단계를 지나 직접 먹을 것을 키우는 시대가 되었을 때, 다수에 의한 폭력의 대결이 시작됩니다. 언덕 위에 마을이 새워지고, 그 주위를 도랑과 울타리가 둘러싸는 모습이 보이고, 깊은 생채기를 가진 유골이 발견됩니다. 동유럽에서는 마을 사람 30여 명을 한데 모아 학살한 사례가 발견되었습니다. 약탈의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물욕이죠.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현재와 같은 생산량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완전히 원시림인 곳을 다 밀어버려야 하는데, 농지를 새로 만드는 것은 그냥 농사를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노력에 비해 생산량이 넘치지는 않죠. 이럴 땐 부족한 식량..
보내주신 편지를 받자오니, 삼가 과분하옵니다. 이곳에 있는 이 몸은 빈궁하여 하나도 가진 게 없어 벼슬도 얻지 못하고 있나이다. 좋고 나쁨에 대해서 화는 내지 말아 주옵소서. 음덕을 입은 후 영원히 잊지 않겠나이다. 부여 구아리 319유적에서 2010년 발견된 목간 중에 나온 소위 442번 목간의 해석문이다, 나중에 다른 책에서 손을 본 문장이 실렸는데, 갠적으론 처음 나온 해석이 더 역사적인 상황에 더 부합한다고 본다. 고대국가, 아니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국가의 특징 중 하나가 매우 극단적으로 작은 정부라는 것이다. 시민의 상당수가 공무원 및 그 가족이라는 북유럽 국가 얘기를 당시 사람들이 들었으면 까무라쳤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통일 후 신라의 중앙정부 관리 정원이 3,600명이다.(여기에는 군 ..